피터 팬 펭귄클래식 45
제임스 매튜 배리 지음, 이은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아이들이 주인공이라고 해서 아이들이 읽어야 할 책은 아닌 또 하나의 예이다.

근래 읽은, 가장 상상력 넘치고 기발하고 유쾌하고, 한편 서글픈 이야기. 부디 내용을 안다고 해서, 그것도 대충 안다고 해서 피터팬을 안다고 하지 말기를.

이 책을 쓴 제임스 매튜 배리는 스코틀랜드 태생으로 대식구 가정의 아홉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식구가 많으니 가정 형편이 썩 좋지는 않았으나 배리의 부모는 자식들을 키우며 종교와 교육의 힘을 강조하였고 기대도 컸다고 한다. 어머니가 제일 아끼고 기대하던 형이 죽고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 배리는 어머니에게 건강과 행복을 되찾아 주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어머니로부터 사랑과 보살핌과 배려를 받으며 커야할 아직 철없는 시기에 이미 거꾸로 어머니에게 그것들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은데 그것은 이후로 배리의 평생 역할이 되었고, 그 인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피터 팬이 등장하는 작품은 이것 하나가 아니다. 실제로 이 책의 원제는 <피터와 웬디 (Peter and Wendy)>. 이 외에도 이 책에 말미에 실려 있는 또다른 짧은 소설 <켄싱턴 공원의 피터팬 (Peter Pan in Kensington Gardens)>, 희곡으로 쓰여진 <자라지 않는 소년 (Peter Pan, or The Boy Who Would Not Grow Up)>등이 있을 뿐 아니라 제목에는 들어가있지 않지만 피터팬의 전조는 이미 <토미와 그리젤 (Tommy and Grizel)>이라는 소설에서 나타나고 있다.

작가가 자신을 자라지 않는 소년으로 이미지화하고 있다는 것을 그의 여러 작품 속에서 느낄 수 있다. 이 책 <피터팬>에서도 첫 문장부터 의미 심장하다.

모든 아이들은 자란다, 단 한 명만 제외하고. (All childeren, except one, grow up.)

첫 문장이 유명한 소설들이 여럿 있는데 이 책의 첫 문장도 그 리스트에 넣어두고 싶다.

피터가 아기였을 때 엄마 아빠가 피터가 어른이 되면 어떤 사람이 될지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 죽어도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 집에서 켄싱턴 공원으로 도망쳐 나온다. 켄싱턴 공원은 실제 런던 시내에 있는 여러 공원들 중의 하나이고 저자인 배리가 자주 산책을 다니던 곳이라고 한다. 이후로 피터는 네버랜드에서 '잃어버린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는데 '잃어버린 아이들'이란 보모가 한눈을 판 사이 유모차에서 떨어진 아이들을 말한다. 이 아이들은 일주일 안에 부모를 찾지 못하면 네버랜드로 보내지게 되고, 피터 말에 의하면 그 대장은 자기이다.

 

수줍음이 지나쳐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성격에, 키도 열여덟 살이 되어서도 150cm 남짓했다고 하는 제임스 매튜 배리.그는 여학생과 교제를 해본 적도 없고 대학 생활에 적응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수줍은 성격과 작은 체구의 배리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코 기다려지는 일이 아니었으며 어쩌면 그에게 있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남들처럼 저절로 자라서 되는 무엇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자기 모습을 힘들게 극복하거나 변신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단계, 그래서 굳이 가고 싶지 않고 되고 싶지 않은 것이었을 수도.

 이 책을 읽다 보면 부모, 특히 엄마와 아이에 대한 부분에서 아이에 대한 엄마의 역할, 즉 배리가 바라는 엄마의 역할, 자기가 엄마로부터 받았으면 했던 모습이 여기 저기서 발견된다.

훌륭한 엄마라면 누구나 아이들이 잠든 밤이 되면 아이들의 머릿속을 샅샅이 뒤져서 낮 동안 마구 어질러진 생각들을 제자리에 갖다 놓고 다음 날 아침을 위해 머릿속을 정리한다. 만약 밤에 안 자고 깨어 있는다면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여러분 역시 엄마가 이렇게 정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걸 지켜보는 건 정말 재밌다.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은 서랍을 정리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러분의 엄마는 우스꽝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아 '도대체 이런 건 어디서 주워 왔지?' 하고 의아해하며 여러분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들을 찬찬히 살펴 볼 것이다. 그러고는 착한 생각은 마치 귀여운 새끼 고양이인 양 뺨에 갖다 대보고 나쁜 생각은 서둘러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버릴 것이다. 아침이 되었을 때에는, 여러분이 꿈나라까지 갖고 갔던 심술궂은 장난과 못된 생각들은 조그맣게 접힌 채로 머릿속 맨 밑바닥에 놓이고 맨 위에는 그보다 예쁜 생각들이 펼쳐진 채로 여러분을 기다릴 것이다. (46, 47)

실제 이런 일을 하는 엄마는 세상에 없지만 엄마에 대한 저자의 로망과 기대와 결핍이 가늠되지 않는지.

소설 중 웬디는 결코 피터의 친구 캐릭터가 아니라 오히려 피터의 엄마의 대변인, 저자인 배리의 엄마의 대변인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아이들은 처음으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 이와 같이 영향을 받는다. 아이들은 부모의 자녀로 태어나면서 자신들이 공정하게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부모가 아이에게 부당하게 대하더라도 후에 아이는 부모를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더 이상 예전의 그 아이는 아닐 것이다. (155)

피터팬에 나오는 악인 '후크'선장. 이 책에서 후크가 단순히 아이들을 잡아가는 나쁜 해적선장으로만 그려져 있다면 그 단순함과 전형성때문에 이 책에 이렇게 애착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14장에서 그리고 있는 후크에 대한 묘사는 이런 선입견을 부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이들을 좋아하고 가까워지고 싶지만 왜 아이들은 나보다 누구를 더 좋아할까 고민하는 모습, 후크의 악행 이면의 외로움, 인간적인 면모를 파고들어갔다.

 

자라지 않아서, 자라고 싶지 않았던 피터팬, 아니 제임스 매튜 배리.

당당히 장편이면서, 읽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고, 지루하기는 커녕 내가 왜 아이들 책을 읽고 있나하는 생각 한번 들새 없이 손에서 놓지 않게 하는 책. 실제로 이 책은 난 아무 결핍 없이 자랐다고 믿거나 '결핍이 뭐야?' 라고 할 어른 아니라면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은 책이다. 아이들이 읽으면 안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모름지기 결핍이란 그 시기를 지나고 봐야 그게 결핍이었는지, 그리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게 되기 때문에 어른이 읽었을 때 더 공감할 것이라는 뜻이다.

 

나의 선입견을 완전히 깨부순 책 피터팬. 읽고 나서도 손에서 놓지 않고 뭔가 더 파고들어야 할 것 같아 자꾸 책장을 이리저리 넘겨 보게 되는 책.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을 공부하시는 분들에게도 좋은 자료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책보다 먼저 읽은 다음 책도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 어른이 된 피터와 앨리스가 다시 만나게 되어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진 연극 대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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