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의 고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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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작가 이름이 귀에 익어, 잘하면 마치 읽은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책들. 이 책도 그런 책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고 이 작품에 대한 사전 지식을 더하지 않은 그 상태 그대로 읽기로 했다. 그리고, 다 읽고 난 후에도 다른 리뷰를 참고하지 않고 내 느낌, 내 생각 그대로 정리해보기로 한다. 작가의 생각과 다를 수 있고, 잘못 해석한 것일 가능성이 분명히 있을 거란 것을 전제한다.

 

과연 되풀이 된 것은 인물들의 이름 뿐인가

 

두 가지 경우 모두 우린 느낄 때마다 새롭다. <사람은 다 똑같다>, 혹은 <사람은 다 다르다>.

내 경우엔 사람은 다 다르다는 것을 느낄 때보다 사람은 다 똑같구나라고 느낄 때 가슴의 울림이 더 크고 오래 간다.

아들 이름에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이름을, 딸의 이름에 고모, 할머니, 증조모의 이름을 그대로 붙여서 인물의 이름을 만드는 것은 이 책의 특징 중 하나인데 작가가 이것을 통해 의도한 것은 무엇일까. 

 

다 다른 사람들이지만 결국 인간이 지니는 본성, 특히 이들이 공유하는 유전자를 통해 전해내려오는 기질과 본성은 달라져봤자 크게 달라질 수 없다는 것 아닐까. 이건 몇개의 사건, 혹은 인생의 어느 일정 기간만 봐서는 알기 어렵고 전체적인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 때 알수 있기에 우리는 이런 작가의 통찰을 빌지 않으면 모르기 쉽다는 점이다.

 

벗어나려 발버둥치든 순응하며 수동적으로 살며 웃음거리가 되든, 결국 인간이 돌아오는 지점은 처음 자리에서 그리 멀리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인가. 결국 제목의 <백년의 고독>을 통해 결정체로 남겨진 사리 같은 진실이 그것이 아니라면 또 무엇일지, 인정하기 앞서 다시 생각해보지만 별 소득이 없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와 호세 아르까디오 두 형제 모두의 정부였던 여자, 삘라르 떼르네라를 통해 작가는 이렇게 예외적으로 자기 생각을 드러내주기까지 하는 걸.

 

그 가문의 역사는 끝없이 반복되는 하나의 톱니바퀴이며, 그 축이 서서히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마모되지 않는다면 영원히 계속해서 회전하는 하나의 바퀴라는 사실을 한 세기에 걸친 카드 점과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었다. (277쪽)

 

작가의 이러한 관점은 쌍둥이 형제인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와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의 예에서도 나타난다.

둘은 아르까디오와 산따 소피아 델라 삐에닷 사이에서 쌍둥이로 태어난다. 이들의 증조모이자 이 소설에서 백년의 세월을 살아온 산 역사인 우르슬라는 쌍둥이의 아버지가 이 아이들의 이름을 역시 조상의 이름을 따서 아우렐리아와 호세 아르까디오라고 지으려고 하자 막연한 불안감을 숨길 수 없다. 가문의 긴 역사를 통해 볼때 똑같은 이름들을 되풀이해 씀으로써 거의 확실한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은 내성적이었지만 머리가 뛰어난 반면, 호세 아르까디오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은 충동적이며 담이 컸으나 비극적인 운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쌍둥이들은 자라면서 생김새 뿐 아니라 행동도 습성도 너무나 똑같아 주위 사람들을 모두 헷갈리게 한다. 그러다가 더 커감에 따라 점차 다른 성격의 인간으로 변해하는데 그때까지 조상의 습성과 반대로 키와 이름과 성격이 서로 교차되어 변해가는 것이다. 이름을 지어주며 걱정했던 우르슬라 할머니는 아마도 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뒤바뀌었을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데, 2권에서 작가는 이 둘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시체들은 똑같이 생긴 두 개의 관에 넣어졌는데, 그 순간 쌍둥이 형제는 소년 시절까지 그랬던 것처럼 죽어서 다시 쌍둥이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장례식 마지막 순간에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게 되고, 술 취한 조객들이 관을 혼동해 두 사람을 각각 다른 무덤에 묻고 만 것이다. 즉, 서로 상대방에게 지정되었던 무덤에 묻히게 된 것이다. 이름과 달리 뒤바뀐 행동과 성격을 보였던 형제들이 결국엔 죽어서라도 원래 가문에 내려져오던 본성과 이름을 되찾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누구도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 소설의 시작이 어떠했는지 돌아본다. 서로 사촌 지간인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슬라가, 근친 상간으로 인해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가 태어날 것을 두려워하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았던가. 근친 상간의 결과에 대한 가공할 만한 공포로 인해 살인을 하게 되고, 마꼰도라는 고립된 도시를 설립하고 새로운 시작을 꾀해보면서도 근친 상간의 굴레는 영원히 바로잡지 못한다. 자매를 동시에 사랑하고, 정부를 공유하고, 이모와 조카가 서로 관계를 맺는 등. 노력과 시도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역사는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톱니 바퀴이며 순환될 뿐이었다.

 

인간은 능력 안의 일, 능력 밖의 일 관계없이 더 개선된 방향으로 올라가고자 계속해서 뭔가를 계획하고 도모하고 실행하지만 그리고 그것이 때로는 성과를 낳기도 하지만, 그것이 또 얼마나 인간을 고독하게 하는가. 성공보다 실패가 많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을 고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실패의 경험에서 언제까지 당당하고 패기있고 자신감있을 수 있는 인간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한 개인이 아니라 백년을 넘어서 가문을 통해 전해 내려올때, 같은 이름의 고독 (Solitude)이지만 고독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게 되고, 그것이 한 나라의 역사, 대륙의 역사, 민족의 역사 속에서는 뽑힐 수 없는 뿌리로 깊어지게 된다.

 

고독과 사랑 앞에 인간은 무능하다.

나의 생이 끝남이 아쉽고 받아들일 수 없는 나머지 <인간 복제>라는 기술의 힘을 빌어 또 다른 나 라는 인간을 세상에 계속 남기고 싶어하는 인간들이여.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어차피 되풀이되는 것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독에 무릎 꿇지 않으려는 인간. 이 책에서는 근친 상간으로 비유되는, "타고난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이기리라는 보장 없어도 그에 대항하려는 필사의 노력, 유토피아에 대한 버릴 수 없는 미련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에 인간. 약자도 강자도 아닌, 그 중간에 걸쳐 있는 이 고독한 모습으로서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주제를 말하려고 쓴 이야기인지, 이 소설 어디에 노벨상의 가치가 있는건지, 한동안 오리무중으로 읽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차 안에서 남편과 인간 복제에 관한 잡담을 주고받다가 불연듯 이 책에 대한 내 나름의 힌트를 잡아내게 되었다.  

작가가 어떤 의도로 썼는지는 작품이 출판되어 세상에 나오는 순간 일단락. 나머지는 읽는 독자의 몫이라고 했던가. 내 몫을 내 맘대로 꺼내다가 먹고, 씹고, 소화시켰다. 하지만 소화가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고, 다시 한번 되새김질 필요성만 슬금슬금 느낄 뿐이다. 그래도 최소한 이 소설이 도대체 무슨 주제를 말하려고 쓰여진 것인지, 이 소설 어디에 노벨상의 가치가 있는건지, 오리무중은 아니다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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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2016-07-11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어차피 되풀이되는 것이라면...이라고 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 물론 생각의 깊이는 제가 한참 모라자겠지만 )

˝넌 참 삐뚤어졌고 , 비관적이야˝ 란 날카로운 말을 들을까봐 입 밖으로는 자주 꺼내지 않는데 , 저는 가끔 생각해요. 아이를 낳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아온 삶이 행복해서 , 아이들도 행복할 거라는 기대를 갖고 아이를 세상에 내 놓는 것일까 하는. 주위를 둘러보면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은 많이 없는데 , 아이들은 끊임없이 태어나요. (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 내 색안경으로 세상을 해석해서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

계급이 없는 사회라지만 , 여전히 노동자는 노동자를 만들어 세상에 내 놓는 것 같고. 내 아이도 나와 비슷한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크고.

엄마가 저를 잘 못 키운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 가슴이 그냥 찢어지는 듯 하더라구요. ( 그게 아닌데...)

마냥 행복한 사람들도 있겠죠. 내가 이렇다고 타인들고 나와 비슷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진 않을 테니까요.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말 늘어놓았네요. ( 일기장에 써야되는데 ㅎㅎㅎㅎ )


hnine 2016-07-12 21:21   좋아요 0 | URL
저도 아이를 낳아 키우지만 제 경우엔 제가 살아온 삶과 다르게 키워보고 싶어서 아이를 낳았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아이를 키우는 일이 결코 순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해볼 가치가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네요.
저도 어릴 때부터 ˝넌 참 부정적이고 비관적이야˝ 소리 많이 듣고 자랐어요 ^^ 들을 땐 좀 억울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틀린 말이 아닌것 같으니 ㅠㅠ
이 책은요, 1권 까지는 별 재미 모르고 읽어가다가, 2권 읽는 중에 ˝오싹˝할 정도로 전율을 느꼈어요. 제가 문장으로 잘 표현을 못해서 못 썼는데, 작가의 통찰력의 끝자락만 겨우 맛보았다고 할까요. 그런데도 오싹했으니 몇번 더 읽어 작품의 의도를 제대로 꿰뚫게 되면 어떨지 모르지요. 대부분의 유명한 작품들중에 이 세상을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본 작품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