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중 엮은 시집이라니
얼마나 더 절절할까 싶어,
읽는 사람 마음을 얼마나 아릴까 싶어,
얼마나 더 허무를 가르칠까 싶어,
차라리 읽지 말까도 했지만
결국 읽을 거라는걸 알고 있었지.
눈이 한번만 지나가지 않고 되돌아 다시 와야했던 구절들을 모아본다. (괄호안은 페이지수)
허무에 추태를 부리는 감정과도 화해를 하세요 (18)
자기를 버린 만족들이 뒹구는 어둔 뒷골목을 지날 때는 태연을 가장하세요 (18)
희망은 가끔 왔으나 언제나 머물지 않는 객(客)이었다 (25)
난 슬픔이 좋아죽겠다 돌아가고 싶은 고향처럼 좋아 죽겠다 내가 자석인지도 모른다 슬픔이 달라붙지 않고는 못견디는 자석인지 난 슬픔이 좋아죽겠다 슬픔 없인 혼자 못산다 이제는 (80-82)
내가 웃을 때 운 자여, 이제 내가 운다 그러니 웃으라 삶은 우울증에 걸린 흉한 나체이니 (90)
해설을 쓴 장석주는 그녀의 시를 루마니아 출신 철학자 에밀 시오랑과 견줄만하다 했다. 비극적 허무주의.
일일이 체험하지 않더라도 삶은 외로움, 절망, 사랑, 그 무엇이든 죽음으로 가는 우울한 행열이라고 느끼는 이상, 허무하고 속절없을 수 밖에 없다는 에밀 시오랑의 대전제이자 결론을 일단 인정한다면, 니체는 그런 허무하고 헛됨은 학문으로도 구제할 수 없고 오로지 예술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냥 저항없이 동의하고 싶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발버둥 쳐보고 싶지 않다.
부정하고 불안하느니
인정하고 편안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