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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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이던가? 전생(前生)이던가? 어제 일이던가? 바로 이 항구로 내려와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한 것은? (9쪽)

사랑하는 친구와 헤어지고, 주인공 (책 속에서 조르바가 내내 '두목'이라고 부르는)은 무겁고 울적한 기분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쉽게 헤어나올 수 있는 친구도 아니었고 이별도 아니었다. 

나는 검은 배와 그림자와 비와 형상을 갖춘 내 슬픔의 실체를 보았다. (9쪽)

친구와 헤어진 바로 그 항구에서 고향 크레타로 향하는 배를 기다리면서 그는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단테의 문고판 책을 여행의 동반자로 삼아 지옥편을 읽을까, 연옥편을 읽을까, 시편을 읽을까,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띄었을까? 문득 누군가 그를 바라보는 강렬한 시선을 느낀다.

"여행하시오?"

"크레타로 가는 길입니다. 왜 묻습니까?"

"날 데려가시겠소?"

"왜요? 함께 무슨 일을 할 수 있어서요?"

"왜요! 왜요! ...... <왜요>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 하는 건가요?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 됩니까? 자, 날 데려가쇼. 요리사라고나 할까요. 당신이 들어 보지도 못한 수프, 생각해 보지도 못한 수프를 만들 줄 압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17쪽)

조르바와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조르바가 먼저 주인공에게 말을 걸어왔고 그런 조르바를 주인공은 외모에서부터 말투에 이르기까지 관찰하고 탐구하기 시작한다. 짧은 대화이지만 조르바가 어떤 인물인지 드러나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주인공의 나이 35세, 조르바의 나이 65세였다. 이 둘 사이를 한마디로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나이가 훨씬 연배인 조르바가 주인공을 '두목'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라고만 볼 수는 없고, 그렇다고 친구라고 보기엔 서로 주고받는 감정과 영향력이 친구 사이의 그것과는 다르다.

단테를 여행의 친구로 삼는다는 것에서도 보이듯이, 쉼 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거기서 삶의 문제, 생사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는 주인공에 비해 조르바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 왜 해야하나 왜 하지 말아야 하는 생각보다 중요한 건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거기서 행복을 느끼고 사는 맛을 느낀다. 그런 조르바가 볼때 두목은 알 수 없는 인간이며 그런 조르바를 보는 두목에게 있어 조르바는 신기함 자체, 새로운 연구 대상이고 그동안 자기가 생각해오던 방식, 걸어오던 길에 대한 딴지걸기이다.

그런 조르바이지만 마음의 갈등을 겪을 때 그는 '두 조르바'의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고 표현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대 악마의 싸움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곧 하느님과 악마는 따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람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스러지는, 마음의 두 상태임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조르바란 인물이 주인공에게는 어떤 책이나 생각보다 더 충격적이고 강력하게 다가오는 경험 자체임을 주인공은 이렇게 표현한다.

전에는 그토록 나를 매혹하던 시편들이 그날 아침에는 느닷없이 지적인 광대놀음, 세련된 사기극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196쪽)

지금 우리가 읽는 책, 우리의 사유, 고뇌도 어쩌면 어느 날 어느 시 맞닥뜨릴 경험으로 인해 지적인 광대놀음, 세련된 사기극으로 몰락할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단지 아직 겪어보지 못한 사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오랜 주제이기도 했고 이 책의 주인공에게 역시 그러했던 궁극적인 인간형, 이상적인 인간형, 최후의 인간형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대목을 찾았다.

최후의 인간 (모든 믿음에서 모든 환상에서 해방된 그래서 기대할 것도 두려워 할 것도 없어진)은 자신의 원료가 되어 정신을 산출한 진흙이며, 이 정신이 뿌리내리고 수액을 빨아올릴 토양은 아무데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인간이다. 최후의 인간은 자신을 비운 인간이다. 그 몸에는 씨앗도 똥도 피도 없다. 모든 것은 언어가 되고, 언어의 집합은 음악이 되어도 최후의 인간은 거기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절대의 고독 속에서 음악을 침묵으로, 수학적인 방정식으로 환원시킨다. (196쪽)

이 대목에서 그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 떠오르는 독자는 나 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가 생전에 준비해 두었다는 묘비명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리고 책 속 주인공이 추구하는 인간형은 믿음과 환상과 기대로 가득찬 인간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벗어난 인간인 것이다. 그것이 자유로운 인간이고 궁극적인 인간이라니, 살아서는 도달하지 못할 인간형이란 말인가.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조르바는 죽음을 두려워 한다. 아니, 그의 말을 빌자면 죽는 건 두렵지 않으나 나이드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조르바가 지켜보는 가운데 최후를 맞이하는 오르탕스 부인은 끝까지 절규했다.

"죽고 싶지 않아! 정말 죽고 싶지 않아..."

자신이 곧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절규하게 하는 그것이 곧 가장 인간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본성, 신과 구별되는 한계,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조르바는 끝까지 자신이 당장 원하는 것을 하며, 생각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진 채, '안전하게'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이 책의 말미에, 조르바와 주인공이 나누는 대화를 보면 그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조르바는 무아지경에 빠져든 듯, 입을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저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요? 두목, 어디 한번 들어 봅시다. 만물은 각기 무슨 의미를 지닌 건가요? 누가 이들을 창조했을까요? 왜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 왜 사람들은 죽는 것일까요?"

"모르겠어요, 조르바" 나는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부끄러웠다. 나는 가장 단순한 질문,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받은 셈이었지만 그에게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모르신다!" 조르바의 둥근 눈이 놀라움으로 열리면서 소리쳤다. 내가 춤출 줄 모른다고 고백했을 때와 표정이 똑같았다. 그는 또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렇게 소리쳤다.

"...... 아니, 두목, 당신이 읽은 그 많은 책 말인데...... 그게 뭐 좋다고 읽고 있소? 왜 읽고 있는 거요? 그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 책에 없다면 대체 뭐가 쓰여 있는 거요?"

(중략)

".....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어디 그 이야기 좀 들읍시다. 요 몇년 동안 당신은 청춘을 불사르며 마법의 주문이 잔뜩 쓰인 책을 읽었을 겁니다. 모르긴 하지만 종이도 한 50톤 씹어 삼켰을 테지요. 그래서 얻어 낸 게 무엇이오?" (385쪽)

조르바의 물음에 주인공은 그동안 50톤 종이를 씹어 삼키며 읽었을 거라는 책, 사유하며, 고뇌하며 알아가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이리 저리 비유하며 설명하려 하지만 조르바를 이해시키지 못한다. 아니, 그 자신 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 조차 희미해짐을 느끼며 새벽을 맞는다.

본연의 질문 앞에 맞닥뜨리는 순간은 책을 읽는 동안 오지 않는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나'하는 질문은 어떤 특별한 '죽음'을 목격하고서 비로서 제대로 시작된다. 조르바가 오르탕스 부인의 죽음을 경험하며 그랬듯이, 개인적인 얘기이지만 나 자신 아버지의 죽음을, 죽어가는 과정을 목격하면서 비로소 열리는 질문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듯이.

그래서 이 책의 결론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417쪽)

이거?

조금 더 읽어내려 가다가 다음 구절을 만났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 놓고 그 인내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 (혹자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혹자는 악마라고 부르는)이 우리를 쳐부수려고 달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부서지지 않았다. 외부적으로는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 외부적인 파멸은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417쪽)

인간의 추구해야할 최고의 지점은 하느님이나 악마의 말씀을 따라서, 또는 타협하면서 사는게 아니라, 비록 하느님이나 악마에 의해 자신의 영혼이 시험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끝까지 부서지지 않고 인내와 용기로 버텨내는 것!

이런 실마리를 던져 준 작가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해야겠다. 내 생각에서 나오는 것으로 못미더운 못난 인간 나는 그 누가 이렇게 확인시켜주기를 바라고 있었나보다.

책 전편에 흐르는 조르바의 마초적 행동과 말에서 느꼈던 거부감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넘어서 찾아내야할 것이 분명 이 작품에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내가 찾아낸, 이 책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구절은, 조르바가 어릴때 한 성인(聖人)이 들려주었다는 다음 구절이다.

 

알렉시스 (조르바의 이름), 내 너에게 비밀을 일러주마, 지금은 너무 어려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자라면 알게 될 것이야. 잘 들어 둬라, 얘야. 천당의 일곱 품계도 이 땅의 일곱 품계도 하느님을 품기엔 넉넉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의 가슴은 하느님을 품기에 넉넉하지. 그러니 알렉시스, 조심해라. 내 너를 축복해서 말하거니와,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내면 못쓰느니라. (3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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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9 09: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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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0 17: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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