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 - 장석주의 서재
장석주 지음 / 현암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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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이 불면인 내게 불면이란 단어는 오히려 새삼스럽다. 하지만 얼마나 멋진 제목인가. 불면이라는 현상이 방해꾼이 아니라 오히려 등불이 되어 나를 인도한다니. 어디로 인도하는지는 극히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일일지도.

중국 시인 베이다오 (北島)의 시 한구절에서 빌려와 썼다는데 이 시는 책 첫 페이지에 나와있다.

장석주. 그가 자기를 소개했듯이 그는 문장노동가이며 날마다 읽고 쓰는 사람이라는 것은 그의 어느 글, 어느 책을 읽어봐도 어렵지 않게 알수 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읽어대고 써대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안 읽고 안 쓰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사람. 그가 지금까지 읽어온 그 많은 책들이 어떻게 각색되어 그의 글로 재탄생되었을지,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 가진 기대감이었고, 시시할리 없다는 확신까지 미리 가지게 했다.

새벽에 일어나 검은콩 두유 한 잔을 마시고, 찐 감자 한 알을 먹는다. 이것들을 소화하면서 만들어진 열량으로 새벽마다 책을 읽고 원고를 쓴다. 소화란 무엇인가? 입으로 들어온 것을 저작과 소화효소 등으로 잘게 쪼개고 아미노산 단위로 분해한 다음 흡수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 안에 내포된 다른 개체의 정보를 분해"하는 것이다. (후쿠오카 신이치, <동적평형>) '나'는 날마다 아미노산 배열이 헤쳐 모여를 하는 불가역적인 시간의 질서 속에서 무언가를 읽고 쓴다. 내 삶은 단조롭다. 나는 그 단조로움에 오래 길들어 있다. 답답해질 때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371쪽)

이 글의 제목은 다른 아닌 '두유 한 잔 감자 한 알'. 후쿠오카 신이치라면 나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서 읽는 저자 아니던가.

나는 아직 읽지 않은 책이지만 그가 이 책에서 <혼자 책 읽는 시간>의 저자인 니나 상코비치가 위기에 빠진 삶을 스스로 일으켜 세우는 방법이라고 소개한 내용도 인상적이다. 2008년 10월 28일 그녀의 마흔 여섯 번 째 생일 날 시작하여 2009년 10월 28일까지, 날마다 책 한 권을 읽고 서평 쓰기로 채운 것. 이렇게 보낸 독서의 한 해 동안 그녀의 책 읽기는 네 아이 돌보기, 커피 타임, 학부모회 모임, 체력 단련 시간, 집안 청소, 요리 , 장보기 때위의 가사노동을 포함하는 일상의 잡다한 의무들과 함께하는 일이었다니, 이 대목에서 내 눈이 반짝.

내가 가만가만, 조용조용 좋아하는 에밀 시오랑에 대한 그의 의견에도 공감한다. 자살하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라고 말하는 루마니아 출신 철학자 에밀 시오랑. 자살에 대해 그렇게 많은 글을 남겼으면서 끝내 본인은 자연사로 생을 마쳤고 자살이란 방법을 택하지 않은 이유는 인간이란 세상에 내던져져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삶의 방식을 찾도록 선고받은 불행한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정리해놓았다. 어느 정도 인생에 대한 낙관과 자살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만이 감히 자살을 시도할 수 있다고. 그러면서 저자 장석주의 맺음말은,

때때로 나도 동물이기를 그치고 싶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분주한 활동을 멈추고 식물의 무의식 속에 서 살고 싶다. 동물에 반해 식물은 얼마나 조용하고 평화로운가. (97쪽)

식물생리학자들이 들으면 단박에 모르는 소리 말라고, 식물은 식물 나름대로 생존을 위해 얼마나 많은 수법을 쓰고 있는지 아냐고 하겠지만 잠시 뒷전으로 하고.

410쪽의 "이토록 조잡한 유토피아"라는 글에서 그는 미국이 빚어낸 유토피아는 유럽인들에게는 착잡한 역설이라고 썼다.

유토피아는 물질화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관념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고, 현실을 가늠하고 평가하는 당위적 표준이고, 현실에서 유통되는 제도와 규범들의 당위성을 재는 잣대다. 그 유토피아가 현실이 되면 그건 반 유토피아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략) 미국은 과거도, 기원도, 창립의 진리도, 시간의 축적도 없이 낙원으로 급조된 나라이다. (413쪽)

어떻게 이렇게 잘 표현했을까.

사유의 방식을 '수목형'과 '리좀형'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도 새겨둘말 하다. 비록 들뢰즈·가타리가 쓴 <천 개의 고원>에서 빌려 온 개념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수목형'은 나무라는 고정된 질서에 수렴되는 사유로서, 차이들을 하나의 기둥으로 환원하는 구조인 반면 '리좀형'은 뿌리줄기가 뻗어 나가는 대로 펼쳐지고 어느 지점에서나 새로운 리좀을 만들며 작은 중심들로 분산되는 구조를 말한다. 즉 펼쳐지는 사유라고 말할 수 있다.

 

두툼하지만 크기는 아담하여 가방에 들고 다니기도, 손에 쥐고 어디서나 펼쳐 읽기도 좋다.

다 읽고 덮을 때 마음은 마치 오랜만에 마음에 맞는 친구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실컷 마음 속 얘기를 주고받고서 아쉬운 작별을 할 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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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 2015-09-12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80년대에 나온 이 분의 시집을 3권 가지고 있는데요. `문장노동가`의 글은 좀 부담스러워 요즘은 잘 읽지 않습니다만 호기심이 생기긴 합니다.
불면의 밤이 괴로울 듯한데, 엄지발가락 부딪치기나 발로 하는 가위바위보가 수면에 도움이 됩니다. 저는 잠을 못자면 술에 취한 듯 헛소리를 내뱉는 경향이 있어서요.^^

hnine 2015-09-13 04:34   좋아요 0 | URL
책 좋아하는 사람들을 한 둘 보는게 아니지만 이분도 참 둘째 가라면 서러울 것 같아요. 원주토지문학관에 들어가는 건 문인이라 그렇다 치고 학생들이 없는 여름 방학엔 대학 기숙사 (연대 원주 캠퍼스가 아니었을까 합니다만)에 들어가 도서관과 방을 왔다갔다 하며 책만 읽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이 책이 처음은 아닌데 시집도 읽은 적이 있는지 기억이 가물거리네요.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불면을 이제 저는 그냥 저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요. 엄지발가락 부딪치기는 저도 들어본 적 있어서 어제 잠자리에서 한번 해봤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