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의 윤리 - 사라진 아이들을 찾아서
유영진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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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상상력과 동화>라는 그의 첫 평론집을 읽으면서 공감하고, 감탄하고, 밑줄치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두번째 평론집이 나왔다. '사라진 아이들을 찾아서'가 부제. 아이들이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궁금해할 독자보다는 짐작하는 독자가 더 많으리라 본다. 아이다운 아이가 없다. 너무나 세상을 빨리 배우고 생존하는 방법을 주입받고 뒤지지 않게 달려야 하는 아이들에게 더 이상 우리가 아는 그 아이들다움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런 아이들을 대상으로 우리가 아는 그 동화를 읽힌다는 것은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저 아이들을 책임지고 있는 부모나 선생님으로써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기 만족을 위한 헛짓아닐까?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치는 부모, 선생님, 또는 어린이 책을 쓰거나 관련 일을 하는 분들은 고민이 많다. 가장 힘든 주체는 어쩌면 아이들 당사자일지 모른다.

 

저자는 왜 윤리라는 말을 제목에 내세웠을까?

 

동화는 이야기이다. 동화가 이야기라는 점에서 동화는 아이들이 정체성을 확립하고 세계와 적절한 관계를 맺는 데 특정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가정을 해볼 수 있다.

그런데 동화책의 구매자인 부모의 요구는 사회적 적응을 통한 '중산층 되기'논리로 기울어지기 쉽다. 이런 기존 질서로의 편입은 문학의 윤리가 아니다. 문학의 윤리는 기존 가치관을 뒤집고 의심하며 고착화된 언어를 흔들어놓는 것이다. (14쪽)

 

윤리는, 기존 가치관을 잣대삼아 답습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존 가치관을 뒤집고 의심하는 것. 문학의 윤리는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기존 가치관 속에 고착화되지 않도록 흔들어놓는 것.

 

오늘날 요구되는 동화의 윤리 중 하나는 현실을 유지시키는 부모의 환상, 즉 성공 신화를 깨뜨려 그 이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환상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어서 현실을 유지하는 강력한 장치로 작동한다. 그래서 이 환상을 깨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객관적 상황보다 주관적 의지를 강조하는 것,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 서사 속에서 주변 상황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데 나만 달라졌다고 하는 것, 즉 사회적 문제의 극복 없이 개인의 의지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입지전적 인물의 형상화는 성공 신화로 함몰될 위험을 안고 있다. (23쪽)

 

이제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더 확실해졌다.

인용한 이 글들이 나와있는 첫 꼭지글 제목이 동화의 윤리-성공 신화의 폐기이다.

 

동화가 소설과 다른 점은 과연 무엇일까?

갈수록 차이가 없어져간다는 것이 그동안 나의 느낌이었고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차이가 없어져간다는 것이지 같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동화가 소설과 구별되는 점은 있을 것이다.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동화 장르는 현실에 대한 비극적 인식보다는 낭만적 인식을 저변에 깔고 있다. '동화'라는 체로 현실을 한번 흔들고 나면 현실성, 계몽성과 함께 꼭 낭만성이 남는다. 이 체의 문제는, 낭만성과 함께 현실순응주의라는 자갈들을 필연적으로 남긴다는 것이다. (48쪽)

 

비록 현실이 비극적이라 할지라도 비극적 현실을 그리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낭만적 시각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읽는 대상을 생각해서이다.

 

유은실의 그간 작품과 약간 비껴간 듯한 작품 <일수의 탄생>을 예로 들면서 나온 다음 문장은 청소년이든 어린이든 그들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쓸때 그들의 심리나 행동에 대해 판단하고 가르친다는 입장에서 쓰기보다는 그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런 주인공을 내세워 쓰는 편을 지향한다는 저자의 의도를 읽었다. 유은실의 작품은 아직 읽지 못했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이 책 저자의 다음 문장이 마음을 치고 지나간다.

 

치유의 힘을 가진 자는 신처럼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질병의 소유자이거나 깊이 앓았던 자인 것이다. (51쪽)

 

동화와 더불어 1990년대 이후로 하나의 쟝르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한국 청소년소설은 여전히 삐약거리는 병아리 단계이고 어른들이 읽는 소설과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동화보다 더 혼돈스럽다. 나야 그저 읽는 사람의 입장이고 세 분야 모두에 순위를 매길 수 없는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다보니 동화, 청소년소설, (어른이 읽는)소설의 구분을 꼭 해야하는지 마땅치 않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현재 동화에서 나타나는 세가지 흐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세가지 흐름 (132쪽)

첫째, 동화의 소설화 경향

둘째, 동화와 청소년소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

셋째, 동화와 판타지, SF, 호러, 추리 등 여러 장르문학과의 결합

 

동화와 청소년소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요즘 우리나라 초등학교 6학년 정도면 웬만한 청소년소설은 읽고 소화할 수 있다고 했다.  문학의 윤리에서 설명했듯이 청소년소설의 당면 과제 역시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 질문을 바탕으로, 청소년들을 학습-기계화하고 정체성 확립을 방해하는 사회구조적 문제들을 파헤쳐나가는 것(115쪽)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청소년소설인 이금이 작가의 <청춘기담> 에 대한 서평에서 저자는 단편과 장편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문득 혹은 느닷없는 사건으로 무언가 삶이 어그러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더이상 이전과 같이 살 수는 없다. 이제는 망가지고 훼손된 것을 회복하거나 봉합하기 위해 분투한다. 이 모든 과정을 그린 것이 장편소설이다.

단편소설은 이와 다르다. 단편은 그가 '내 삶이 무언가 어긋난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순간, 익숙했던 모든 게 낯설어져 이전과 같이 살 수 없다는 깨달음이 번쩍하는 순간 끝이 난다. 그래서 좋은 단편을 다 읽고 나면 가슴에서 뭔가 툭 하고 떨어지거나,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224쪽)

 

평론집이고, 평론가이니, 더 어려운 용어로 설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 어렵고 전문적인 용어로 설명한다고 해서 이보다 더 명쾌하고 전달력 있었으리란 보장은 없다. 이 문장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책 전체가 그렇다. 어렵고 모호할 수 있는 이야기를 가능한 가장 쉽고 기본적인 언어로 묘사할 수 있는 능력, 나는 그것을 그사람의 어떤 분야에서의 능력, 혹은 실력이라고 본다.

 

이틀 걸려 다 읽고나니, 다 읽어냈다는 후련함보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뭔가 더 읽고 싶은 마음이랄까?

한번 더 읽을 날이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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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4 15: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5-03-14 21:14   좋아요 0 | URL
우리 이미 어린이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거쳐왔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책을 읽다보면 거쳐온건 맞지만 끝나진 않아서 아직도 어느 구석에 남아있다는 생각이 드는거예요.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어린이와 청소년책을 쓰거나 평한다는게 쉬운 일은 아닐텐데, 그래서 뜬금없는 방향으로 글이 흐르기 쉬울텐데 이책 저자는 현장에서 어린이들을 매일 대하고 있기 때문인지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냉철하나 이해안되는 부분 없게 쓰여진, 아주 맘에 쏙 드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