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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치카 No.9
이은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9월
평점 :
한동안 보관함에 담겨 있던 책 두권을 주문했는데 그 중의 한권이다.
지금처럼 팟캐스트가 다양해지기전 부터 '문장의 소리'라는 팟캐스트를 듣는게 낙이었는데 이은선이라는 이 작가는 그 문장의 소리의 구성작가였다가 2010년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하였고 작년이었던가 첫 소설집인 이 책을 낸 후엔 본인이 그 방송에 초대작가로 나온 적이 있다. 그때 이 책에 대해 소개를 듣고 읽어봐야겠다 생각이 들어 보관함에 담아놓았더랬다. 그때 방송에서 듣기로, 작가는 대학 졸업후 경험을 넓힌다는 목적으로 우즈베키스탄에 갔고, 거기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했다. 러시아와 가깝다는 것 정도 밖에 아는게 없는 그 나라에서의 경험, 즐겁지만은 않았던 경험들이 바탕이 되어 이 책의 대부분의 단편들이 만들어졌다. <발치카 No.9> 이라는 제목도 그렇지만 <까롭까>, <톨큰>, <분나> 등, 책 속의 단편 제목들도 낯설다. 우즈베키스탄의 소수 민족 언어라고 하니 그럴 수 밖에. <살사댄서의 냉풍욕>, <판타롱 아일랜드> 라는 제목들도 분위기가 만만치는 않기는 마찬가지.
모두 열 편의 단편이 들어있다.
카펫: 목화를 재배하여 카펫을 짜서 생계를 잇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야말로 생계만 겨우 이어갈수 있을 뿐 병이 나도 치료도 받을 수 없는 형편. 아픈 자식을 머나먼 타국에 보내서라도 치료 받게 하고 싶은 어미와, 그렇게라도 희망이 있다는 것에 오늘을 걸고 사는 아이가 나온다.
빛나던 해가 들판으로 가라앉았다. 훌렁, 들판이 들썩였다. 지평선이 하늘 높이 치솟았고 모글모글한 목화송이들이 허공에 떠다녔다. 몸이 훌쩍 떴다. 톨큰이 녹물을 흘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엄마가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엄마, 나 이제 정말 괜찮아진 것 같아! 환한 빛이 들판을 감싸 쥐었다. 목화송이 하나를 잡아 그 위에 올라타고 하늘을 헤엄쳤다. 저 멀리서 다시 큰물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엄마, 율두스 조심해요! 나는 있는 힘껏 헤엄쳐 파도가 이는 곳으로 갔다. 여러 척의 목화 배들이 내 옆을 스치며 배들의 무덤 쪽으로 향했다. 물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던 거대한 철갑상어 한 마리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목화송이를 가득 쥔 손을 힘차게 흔들어주었다. 젖은 눈을 물 위에 떠 있는 목화송이에 스윽 문지른 철갑상어도 나와 목화들을 따라 배들의 무덤 쪽으로 헤엄쳐 왔다. 수평선이 다시 하늘로 치솟았고 나는 두손 가득 움켜쥔 목화송이를 하늘로 띄워 보냈다.
넓고 푸른 바다 위, 하얀 목화 배를 탄 나였다 (33-34쪽)
이 단편의 결말이다. 아이는 살아나나? 아니면 죽음을 의미하나? 어디까지가 실제 상황이고 어디부터가 아이의 상상인지 모르겠다. 의미를 곱씹을겸 문장이 아름다와서 읽고 또 읽고, 옮겨적어본다. 83년생. 아직 젊은 작가인데, 이런 수려한 감성, 비유, 상징의 문장력이 책의 여기 저기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까롭까: 까롭까는 '상자'라는 뜻이라고 첫 페이지의 조그만 설명을 못 봐서, 읽는 내내 글 속의 '나'가 누구일까 추리해야했다. 글 속의 나는 사람이 아니라 다름아닌 까롭까, 즉 상자였다.
보를라의 눈물이 모래사장에 하나, 하나 점을 찍었다. 나는 물 점들을 따라 모래 위로 가느다란 길을 내었다. 간간이 허리를 꺾은 채 걸음을 쉬던 보를라는 맑은 눈물이 핏물로 바뀔 때까지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내 몸이 그어온 길에 빛이 고였다. 빛 속에서 죽은 아이의 울음이 터졌다. (69쪽)
역시 이 단편의 마지막 부분이고, 한번 스윽 읽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는 문장이었다.
톨큰: 톨큰은 '파도'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바다로 가는 강줄기 옆의 작은 마을을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화자는 사람이 아니라 새. 수호새인 아내를 잃은 남편새이다. 권력의 이름으로 붕괴되는 마을의 현장에서 마을 사람들의 부질없는 기원과 함께 죽어가는 수호새의 이야기이다. 처절한 파국의 이야기를 수려한 문장력으로 더 처절하게 그려놓은 듯 하다.
분홍코끼리: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 같다는 생각은, 예전에 작가 인터뷰 방송을 들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모르고 읽었더라면 결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듯. 사람은 무슨 권리로 다른 생물들을 오직 우리의 즐거움을 목적으로 가두고 훈련시키고 매질 하는가.
발치카 No. 9: 이쯤에서 불만이 조금씩 불어나기 시작한다. 작가는 독자에게 좀 더 친절할 수 없었나 하고. 이건 99% 독백이잖아? 어떻게 알아들으라는 거야, 불만 불만.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 발치카가 뭔가요? No.1부터 No.9까지는요? 사건의 일련 번호인가요?
살사댄서의 냉풍욕: 제목이 희극적인가? 내용은 역시 아니다. 표정은 웃고 있지만 마음은 눈물에 늘 젖어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니까. 오랜만에 저 먼 나라가 아닌 우리 나라가 배경이지만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와서 못겪을 일 겪으며 살고 있는, 삶다운 삶이 아닌 삶을 살고 있는, 스물 여섯 여자가 나온다.
분나: 이것이 무슨 뜻인지 글 중에 단한번도 소개가 되지 않는다. 커피를 뜻하는 것 같다고 추리할 뿐. 작품 속 소녀의 이야기는 이 세상엔 죽음보다 못한 삶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라, La: 갈수록 점입가경이랄까. 아들의 묘를 파고 내려가 그 위에서 생을 마치는 노인, 그에게 핏줄은 삶의 이유이고 종교였나. 평생을 믿고 지켜오던 것이, 그보다 더 속물적이고 눈앞에 보이는 욕망의 산물에 의해 순식간에 무너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 그 믿음이 뼈속까지 새겨져 있는 그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죽음으로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인가보다.
이화: 이 역시 주인공의 출생부터 시작해서 온갖 구렁텅이에 빠지길 거듭하는 일생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이 책에 실린 다른 작품들에 비해 예외적으로 해피엔딩이다. 그래, 이 정도로도 해피엔딩이랄 수 있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앞으로는 지금보다 나아질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품게 하니까, '파국'으로 끝내진 않고 있으니까.
판타롱 아일랜드: 수몰되는 마을, 수몰되는 집, 수몰되는 엄마의 무덤, 자의반 타의반 수몰되는 나와 아버지.
연상되는 작가나 작품은 김이설과 앨리스 먼로. 대체로 파국과 파멸의 과정을 질펀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치부와 환부를 드러내는게 거리낌이 없다는 점에서 김이설의 소설을, 길어질 수 있는 서사를 모두 단편에 압축적으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농축하여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앨리스 먼로를 떠올렸다.
어차피 소설은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전제를 두고 쓰여지는 것인데, 독자들에게 좀 더 친절할 수는 없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미리 듣고 읽었으니 다행이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 작품들이 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과연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있었을까? 이전에 방송에서 인터뷰하는 사회자가 안그래도 그런 질문을 했더니 작가 답하기를, 본인도 걱정을 했으나 출판사의 편집자가 배경이 중요하기 보다 사람들이라면 통하는 면이 있으니까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그대로 출판해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던가? 그렇게 기억한다. 하지만 작품엔 손대지 않더라도 뒤에 작가의 말이라든지, 그런 곳에라도 이 작품들의 배경에 대해 두어 줄 넣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일관하는 주제의 서사, 감탄하게 하는 문장. 별 다섯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가 별 하나 지운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