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동으로 이루어진 우리 아파트에서 우리 집이 있는 동은 소위 말하는 로얄동은 아니다. 마루 창으로 내다보면 앞이 툭 트인 대신 아파트 단지의 한쪽 끝을 알리는 시멘트 담과 그 위에 나무와 풀이 자라는 작은 언덕이 가로막고 있다. 내 방의 책상이 그 창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책상에서 고개만 들면 작은 나무 언덕을 언제나 볼수 있다.
아침 6시경, 때로는 부엌에서 아침 준비를 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어떤 날은 책상에 앉아 있을 때도 있는데 부엌에 있는 동안은 못듣고 지나치지만 내 방에 앉아있을때는 영낙없이 새소리를 듣는다. 바로 우리 집이 숲을 곁에 두고 있는 덕분일거다.
'너도 일어났니? 우리 식구들은 아직 자고 있단다.'
저건 무슨 새의 노래 소리일까 궁금해하며 혼잣말을 하기도 한다.
소리만 들을 수 있는게 아니다. 꿩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남편인데,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마루 창으로 부르더니 건너 숲을 가리키며 저기 좀 보라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꿩이 종종거리며 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 마리 옆에 또 한 마리. 신기해하며 본 그날 이후로 종종 꿩을 볼 수 있었다. 밖에 나갈 필요도 없이 바로 우리 집 마루에 서서.
오소리를 처음 본 그날도 책상에 앉아 일을 하던 중이었다.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는 중이었지만 순간적으로 눈 앞에 뭐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일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던 모양). 고개를 들어 창 너머 언덕쪽을 보았더니 '오소리'라고 생각되는 동물이 두 마리 어슬렁거리며 다니고 있었다. 놀랍고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사진 찍을 생각도 못하고 그냥 그자리에 얼음이 되어 구경만 했더랬다. 꿩에 이어 오소리까지.
며칠 후엔 고라니까지 볼 수 있었는데 난 그게 고라니인지 몰랐다. 사슴처럼 생겼는데 사슴이라 하기에는 훨씬 몸집이 작았다. 나중에 우리 집 아이가 보더니 "고라니다!" 하는것이다.

- 이미지 출처는 서울대공원 웹사이트 -
겨울, 유난히 추운 날엔 가끔 저 동물들 생각을 하기도 한다. 뭘 먹고 어디서 추위를 피하고 있을까 하고.
전망은 좀 떨어지는 우리 집이지만 마루에서 꿩, 오소리, 고라니 볼 수 있는 우리 집이 좋다고, 다음엔 카메라 준비하고 있다가 사진도 찍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다가 문득 든 생각.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이 원래는 쟤네들이 살고 있던 터전이었겠구나, 어느 날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산이 깎여나가고 땅이 파헤쳐지고, 그렇게 원래 살던 동물 식물들 다 쫓아내고 만든 아파트에 지금 내가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사는 이곳의 주인은 쟤네들인 셈인데.
미안하다...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