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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예찬 -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ㅣ 예찬 시리즈
다비드 르브르통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1월
평점 :
중학교때 한문 시간에 배운 한자로 '신독'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떠올린 신독은 '혼자 있을 때에도 조심하여 말과 행동을 삼가한다'는 뜻의 '愼獨'이 아니라, '경전을 단순히 입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행한다'는 뜻의 불교 용어 '身讀'이었다.
수업 시간에 같은 음으로 읽지만 두 가지 다른 뜻에 대해 배우며, 몸과 마음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거나 아니면 연결되어야 옳은가보다 어렴풋이 짐작했던 기억이 난다.
몸이든 마음이든 무겁고 명쾌하지 않을 때 제1처방은 걷는 것. 저자도 말했듯이 걷기는 삶의 불안과 고뇌를 치료하는 약이니까 (255쪽).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걷는 동안 몸과 마음에 어떤 변화가 어떻게 오는지 다 알테지만, 아마 이 책의 저자만큼 수려한 문장으로 그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번역을 그만큼 훌륭하게 해내었다는 말도 될까.
때로는 머리 속을 채우고 있는 문제 거리를 곰곰히 생각해보느라 걷지만 때로는 생각 자체를 내려놓기 위해 걷는다.
때로는 걷고 있는 내 발을 보며 걷지만 때로는 왼쪽 오른쪽 살피며 꽃이나 나무를 보며 걷는다.
어떻게 걷든, 마음만 혼자 힘들어할때 몸에게 알려주는 걷기.
몸이 무거울때 그걸 이미 알고 같이 무거워지려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걷기.
저자는 사회학을 전공한 교수이지만 '몸'의 문제와 중요성에 오래전부터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
(81)노래는 보행의 도반이요 마음의 균형추다.
(250)걷는다는 것은 지극히 본질적인 것에만 이 세계를 사용한다는 것을 뜻한다.
(252)길을 걷다보면 세계가 거침없이 그 속살을 열어보이고 황홀한 빛 속에서 그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들을 만나기도 한다. 이는 어떤 개인적인 변신의 문턱 같은 것이다.
(258)길은 구체적인 걷기 체험을 통해서, 때로는 그 혹독한 고통을 통해서, 근원적인 것의 중요함을 일깨움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고통스런 개인적 역사와 인연을 끊어버리고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일상의 길에서 멀리 떨어진 내면의 지름길을 열도록 해준다.
(261)우리가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이 우리를 만들고 해체한다.
(264, 역자 후기) 오늘날 우리의 정체성을 가장 먼저 지시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육체다. 이것은 뒤르켐의 오래된 직관이다. 즉 몸은 개인화의 요인인 것이다. 개인주의 사회에서 우리를 세상에 내놓는 것, 우리를 인정받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몸이다.
걷기 예찬은 삶의 예찬이요 생명의 예찬인 동시에 깊은인식의 예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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