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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나고 다른 아이들이 각자 여기 저기 학원으로, 또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릴 때 그 때가 나에게는 뭔가 시작하는 시간인 듯 미술실로 향했다. 미술 선생님은 그저 주제만 주실 뿐, 나는 그것을 보고 떠오르는 것들을 글로 끼적거렸다. 읽었던 책의 어느 대목이 장면처럼 떠오를 때도 있었고, 어느 작가의 분위기가 연상되기도 했다. 그런 모든 것들을 그림보다 먼저 글자로 스케치한다고나 할까. 그림보다 글이 먼저 만들어지는 것이다. 미술 선생님은 나의 그런 과정을 매우 흥미롭게 보시는 것 같았다.

“넌 글도 잘 쓰는가보다?”

“잘 쓴 다기 보다 자동적으로 그냥 그렇게 돼요.”

“그림은 단순히 그리는 기술이 아니지. 너처럼 그렇게 자기 머릿속에서 그렇게 떠오르는 것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은 그것을 적절한 방법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해. 그것이 그림일 수도 있고, 조각일 수도 있고, 사진일 수도 있고, 이 중 몇 가지를 복합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고. 그것은 누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야.”

누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어쩌면 나는 이때 처음 들어본 것 아닐까 한다. 아니, 이전에 설사 들어본 적이 있다 하더라도 이날 처음 들은 것으로 하겠다. 선생님은 실제로 나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지시하거나 가르치기 보다는 오히려 내가 하는 과정을 지켜보시고 질문을 하시고 나의 답을 열심히 들어주셨다.

 

 

기말 고사를 며칠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수업이 끝나자 오늘 따라 학교가 금방 비워지는 듯 했다. 미술실로 가려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창 너머로 운동장을 내다보고 있었다. 저 애들은 각자 저렇게 바삐 갈 곳이 있구나. 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 있구나. 예전에 상철이가 학원을 빼먹고 우리와 어울려 카페에 처박혀 놀고 있는데 학원에서 금방 문자 메시지가 오는 것을 보았다. 상철이 말로는 같은 메시지가 아버지 휴대폰으로도 전송된다고 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은 없다. 나는 그때그때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뿐이다. 좋아. 좋지 않은가?

혼자 피식 헛웃음을 날리고 있는데 어깨에 감촉이 느껴져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느라고 몇 번씩 말을 시켜도 대꾸가 없냐? 무안하게스리.”

우리 반 ‘마담’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범생이 스타일이면서 성격도 좋아서, 비슷한 범생이들부터 노는 애들까지, 미움이라곤 받지 않는 우리 반 반장이다. 어디다 내놓아도 번듯하다는 뜻으로 우리는 녀석을 마담이라고 불렀다.

“어? 어...... 집에 안가고 뭐하냐?”

“그러는 넌 집에 안 가고 여기서 뭘 그렇게 내다보고 있는데?”

“저기 되게 쭉빵한 여자애가 지나가기에 거기 쳐다보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왜?”

실없는 나의 장난말에 마담이 푸하하 웃음을 폭탄처럼 터뜨렸다.

‘뭐 그리 웃긴 얘기였다고 얘가 이렇게 웃어?’

내가 오히려 멋쩍어지는데 마담이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넌 평소에 말도 없는 녀석이 어쩌다 한번 입을 열면 사람을 완전 깨게 하잖아.”

무슨 말인지 나도 알 것 같아 나도 그저 큭큭 따라 웃었다. 원래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난 것인지, 아니면 어릴 때부터 워낙 말상대가 별로 없다보니 그렇게 성격으로 굳어진 것인지, 아무튼 말이 별로 없다는 얘기는 어릴 때부터 한 두 번 들은 것이 아니니까.“

너, 오늘도 미술실 가냐?”

“응?”

“너 미술실에 있는 거 여러 번 봤다.”

내가 방과 후에 미술실 가서 그림 그리는 것을 비밀로 할 것도 없지만 누군가 알고 있을거라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마담의 그 말에 난 솔직히 좀 놀랐다.

“나야 뭐, 수업 끝나고 나면 할 일도 없고, 공부는 싫고, 그냥 미술실에서 혼자 놀다 가는 거지 뭐. 너도 미술 관심 있어?”

질문의 화살을 마담에게로 돌리기 위해, 별로 궁금하지도 않던 것을 물어봤다.

“모르냐? 나 중학교때부터 입시전문 미술학원 다니고 있는거?”

학교도 제대로 안나가는 내가 반 아이들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중학교때부터 대학준비를 했단 말이야 그럼?”

“고등학교도 예고 봤다가 떨어져서 여기 왔지. 소질이 없나봐. 그래도 포기를 안한다.”

“힘들겠다.”

너무 솔직히 말했나 싶은데 마담이 피식 웃었다.

“그래, 포기 안하는 우리 아버지가 나보다 더 힘들지도 몰라.”

그러니까 포기를 안하고 있는 것은 마담이 아니라 마담의 아버지라는 말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원래 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할아버지가 반대해서 못했거든. 어릴 때 무슨 미술대회에서 상 한번 받은거 가지고 내가 그림에 무슨 대단한 소질이라도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나보고 화가로 성공할 놈이라고 굳게 믿고 계시다, 오늘날까지. 크크.”

웃는 소리를 내고 있는 마담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원래 부모님들은 자식을 자기 인생의 제2의 기회로 삼지 않냐?”

내 말에 마담은 금방 대꾸를 하는 대신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부럽다 자식아!”

갑자기 뭔가 잊었던 것을 생각해 낸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마담이 말했다.

부럽다고? 내가? 사람 놀리나.

그런데 돌아서 가는 마담의 뒷모습이 어딘지 쓸쓸해보였다.

 

 

미술실에 가니 선생님은 바로 전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제출하고 간 그림을 채점하고 계셨었는지 앞에 수북이 쌓인 스케치북을 막 정리하고 계셨다. 검사를 막 마치신 듯 하여 며칠 전부터 작업하고 있는 ‘My special place' 라는 작품에 대해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었다. 나의 특별한 장소라는 주제를 듣고 내가 처음 떠올린 것은 나의 침대 밑. 그 속에 온갖 나의 무의식들이 꿈틀거리며 뛰쳐나올 때만 기다리고 있다. 아크릴화로 그리고 침대 밑은 사진을 가지고 콜라주 기법을 이용해 나타내었다. 어느 한, 두 색만 가지고 채도를 달리한 다양한 색조를 쓰는 것을 나는 좋아했는데 이 작품의 주제색은 보라와 회색이었다. 선생님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도중 문득 지금 이 곳, 바로 이곳이 언젠가는 나의 특별한 장소로 떠올려지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와 담 쌓고 지내던 녀석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학교에 꼬박꼬박 나오는 것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담임선생님은 나를 기특하게 여기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의아스럽다는 눈초리를 보내곤 하셨다. 하루 7교시까지의 수업 시간표가 그 이후의 한두 시간 때문에 견딜 만 했다는 것이 나한테도 신기하긴 했다. 그러던 중 나의 작품 '이카루스’가 전국 학생 미술 대전 예선에 통과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제는 본선 출전을 준비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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