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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방학을 하면 나는 의례 서울을 떠나 개학이 될때까지 아버지와 강진이, 그리고 새엄마가 계신 집에 내려가 있었다. 동네에서 양품점을 하는 새엄마는 낮엔 거의 집을 비웠고 강진이는 갈수록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장난질을 일삼는 악동이 되어가고 있었다. 빈 집이나 다름없는 집에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어릴 때 그랬듯이 아버지께 부탁하여 사들인 책들을 읽거나, 역시 아버지가 지난 생일 선물로 사주신 디지털 카메라를 주머니 속에 넣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혼자 돌아다니곤 했다. 어릴 때부터 눈에 익숙한 곳들이지만 카메라를 통해 다른 각도로 들여다보면 얼마나 다르게 새로운 모습으로 보일 수 있는지 혼자 신기해하면서 내 카메라 폴더를 채워가는, 누가 보면 심심해보일지 몰라도 나 자신은 조금도 심심하지 않은 내 방식의 시간 보내기를 하였다.

내가 알고 있는 우리 가족이 어쩌면 진짜 나의 가족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게 된 것은 작년, 그러니까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의 어느 날. 그 길고도 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겨우 몇 장 안 남기고 있던 날이었다. 점심때가 다 되어갈 무렵 드디어 읽기를 다 마치고 뿌듯한 마음으로 다른 책을 찾아 의자를 놓고 올라가 책꽂이의 윗칸에서부터 아래 칸까지 살피고 있던 중, 5단 짜리 책꽂이 맨 위에서 웬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아래서 올려다보면 있는지도 모를 위치였다. 심심하던 차에 상자를 꺼내어 방바닥에 내려놓고는 무슨 상자일까 궁금해 하며 열어보았다. 먼지가 뽀얗게 묻은 뚜껑을 열자 거기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뒤죽박죽 빼곡히 들어있었다.

색이 바라기 시작한 컬러 사진은 흑백 사진보다 더 오래 되어 보이고 애잔해 보였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아버지, 친구들과 계곡에서 어울려 찍은 사진, 공사 현장인지 안전모를 쓰고 있는 사진 등 아버지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을 얼마 다니지 않아 그만 두고 집 짓는 일을 시작, 크진 않아도 지금의 건설업체를 손수 일궈낸 자수성가형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엿볼 수 있었다.

휙휙 보아 넘기다가 어떤 사진 한장에 눈길이 꽂혔다. 단출한 가족사진으로 보이는 그 속의 젊은 남자는 아버지라는건 금방 알아보겠는데, 아버지 옆, 그러니까 보통 이런 사진에서 아내의 위치에 해당하는 자리에 서있는 여자는 누군지 모르겠다. 계속 보고 있자니 아주 낯설지는 않은 것 같기도 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그 누구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앞의 아기, 혼자 서지도 못할 정도의 어린 아기, 그건 다름 아닌 나였던 것이다. 사진 아래 날짜가 인쇄된 것을 보니 내가 태어난 다음 해 봄이었다. 그러니까 강진이 일리도 없단 말이다. 그럼 이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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