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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던 곳 평택에서 서울까지가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열두 살 내게 서울은 낯설었다. 갑작스런 전학에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으쓱하는 마음도 있었다. 아마 어리둥절을 으쓱함이 잠시 누르고 있었나보다. 적어도 처음엔 말이다.

서울에 아버지가 얻어주신 집은 강북의 작은 연립주택이었다. 도우미 할머니께서 아예 우리와 함께 살면서 돌봐주셨고 가끔 아버지께서 올라오시는 식이었다.

낯선 서울, 낯선 학교에 익숙해지고자 처음엔 꽤 노력을 했다. 학교 수업 시간에는 한눈팔지 않으려 애썼고 숙제도 열심히 해갔다. 말이 없는 성격 때문에 친구를 금방 사귀지는 못했지만 시험 보면 성적은 좋은 편이어서 서울로 이사시켜놓은 것에 대해 아버지는 일단 안심하셨을 것이다.

문제는 강진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인 강진이는 5학년이었던 나에 비해 아직도 누군가의 더 세심한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였나 보다. 서울로 올라오고 나서 자주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머리만 아프다고 할 때도 있었고 배도 같이 아프다고 할 때도 있었다. 그러는 날이 잦아지자 아버지는 강진이를 데리고 종합병원까지 데려가 진찰을 받게 했지만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여전히 강진이는 두통을 호소했고 가끔 조퇴에 결석까지 하는 날이 생기자 아버지는 결국 나는 남겨두고 강진이를 평택 집으로 데려가셨다.

매일 함께 지내던 녀석이 떠나고 나자 있을 때와 기분이 참 많이 달랐다. 함께 있을 땐 안 나던 생각들이 가끔 나기도 했다. 어떤 땐 강진이 얼굴이 눈앞에 자꾸 어른거려, 실제 강진이가 여기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옆에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 넓은 서울 바닥에 그래도 나 혼자는 아니었는데.

‘나도 가끔 머리 아프고 배도 아프단 말이야 자식아. 나도 여기 이렇게 떨어져 나와 지내는 것 싫단 말이야.’

아버지를 따라 나서는 강진이 뒤에서 그렇게 마음속으로 외치면서도, 형이랑 그냥 여기서 지내자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내지 못하고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래, 잘 가. 가서 아프지나 마. 나는 형이니까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어.”

겨우 초등학교 5학년. 그 나이에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는 아이가 몇이나 될까. 난 참 솔직하지 못했다. 혼자서도 잘 지내야만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시키고 있었다고 해야 맞다. 그렇게 조금씩 혼자 지내는 법을 배웠던 것 같고, 그게 지금 생각하면 가끔 원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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