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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김숨. 작가가 아닌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친구로서, 아내로서, 앳되 보이지만 이제 마흔에 들어선 한 인간으로서의 그녀는. 왠지 관심이 가는 작가이다.
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녀가 책과 관련된 인터뷰차 라디오 방송에 초대손님으로 나와 얘기하는 것을 몇 차례 들었다.
'읽어봐야지'
하지만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봤기 때문에 이번에도 책 내용이 아주 재미있으리라고 기대한 건 아니었다.
300쪽, 꽤 묵직한 두께, 뭔가 무게가 실려있는 제목.
진화하는 적이라니? 두 여자의 이야기라는 것은 소개를 통해 알고 있었으니 '적'이라는 단어는 그 둘의 관계를 드러내준다고 하지만 '진화'는 대체 무슨 의미?
전체적인 줄거리가 단순하고 요즘 소설답지 않게 구성도 복잡하지 않아서 다음 장을 궁금하게 하는 이야기가 아님에도 책장이 빨리 넘어갔다.
책 속에서 '여자'라고 불리는 시어머니와, '그녀'라고 불리는 며느리. 남편도 나오고 아이도 나오고 이웃집 여자가 잠깐 등장하지만 존재감은 거의 없고 이 '여자'와 '그녀'가 거의 이 책 300쪽을 채우고 있다.
어느 날 이유없이 침이 마르는 구강건조증에 걸리는 시어머니. 시어머니에게 살림과 육아를 맡기고 홈쇼핑 콜센터 전화상담원으로 일하는 여자는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지금의 보잘 것 없는 신분으로부터 벗어나는게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기다리는 이유이다. 시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침이 마르는 병에 걸렸듯이 며느리는 어느 날 갑자기 특별한 이유없이 해고를 당하고서 앞으로의 일이 막막하다. 5년을 함께 살아도 인간적인 교류가 거의 없는 시어머니도 내쫓아버리고 싶다.
여기 나오는 며느리는 이 소설뿐 아니라 흔히 보는 며느리 캐릭터이지만 오히려 시어머니는 읽는 사람조차 가슴을 치게할 정도로 답답하고 의뭉스럽기만 한, 아주 특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속물인지 도인인지, 제 정신인지 치매인지, 욕심이 하나도 없는지 욕심으로 가득 차있지만 철저히 감추고 있는지, 도무지 파악이 안되는 이유는 좀처럼 자기 생각을 말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대조적인 두 캐릭터만으로, 특별한 사건도 없이 장편의 소설을 써냈다는 것, 이 소설에서 제일 인상적인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럴 것이 이 작가는 어딜 보나 스토리로 승부를 보는 작가는 아님이 분명하다. 즉 '서사'가 아니라 '묘사'가 무기인 것이다. 침이 말라가는 과정, 증상, 가난,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보는 시각, 갑자기 단수가 되어 물이 안나오자 드는 생각, 여기서 확대되는 상상, 실로 이 작가의 묘사력은 뛰어나다. 실제로 책의 초반부는 수십장이 넘어가도록 대화가 거의 안나온다. 며느리의 입을 빌어, 며느리 자신을, 시어머니의 외양을, 시어머니의 심리를, 아이의 심리를, 자기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묘사로서 페이지를 채우고 있다.
이야기의 빈약함을 보상해주는 것으로서 이런 묘사력외에도 제목과 상응하는 개념들을 책 중간중간에 도입하기도 했다. 번식이니, 멸종, 진화, 완두콩과 돌연변이, 종의 분화, 공생 등을 책 속의 소제목으로도 이용하고 본문 중에 비유의 방법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 어거지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능력도 갖추었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그 의뭉스럽고, 자기 존재를 스스로 소멸시키고자 작정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특이한 행동 방식이 있기 까지 그 배경이나 이유를 개연성 있게 풀어내길 기대했건만, 책의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그러지 않고 맺어버린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소설에서 아쉬운 점이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인기리에, 많이 읽혀지는 책은 아니지만, 무슨 무슨 문학상에는 최소한 후보로 올릴수 있을 것 같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쪽을 작가가 지향하는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