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는 밤 랜덤소설선 11
윤영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인간의 삶이라는게 너무 빤해요. 그래서 소설도 빤해요. 조금은 외롭고 조금은 어처구니없고, 살아 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울고 싶고 또 살아 있는 사람의 대부분은 불쌍하고, 꼬리는 ...... 나이가 들수록 꼬리는 너무 크고 둔중해서 감히 잘라낼 엄두조차 못하지만 꼬리에게 질 수는 없어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인간이니까요. (238쪽)

 

이 책을 읽기로 한 것은 평소의 윤영수라는 작가에 대한 호감과 책 소개글에서 본 위 구절이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나아간다...인간이니까...

'소설'이라는 단어를 제목 속에 달고 있는 소설은 과연 어떤 내용일까. 작가의 전작 <귀가도>를 읽어본 사람으로서 그게 어떤 내용이든 어떤 다른 소설과도 다른 소설일 거라는 짐작은 맞았다.

책장을 들춰보니 여섯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각각 다른 이야기이기도 하고 이어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연작이라고 이름 붙이기 묘한, 어쩌면 끝까지 이 여섯 이야기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모르고 읽을 수도 있을 이야기들. 구성부터 심상치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 이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 -

<무대 뒤의 공연>

무대 위의 공연보다 더 리얼한 무대 뒤의 공연. 한 병실에 입원한 네 여자의 사정은 다르면서 닮아 있다. 내과 병동 302호의 1번 침상 환자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7년 동안 마비된 몸으로 병상에 누워있는 여자. 2번 환자는 죽으려고 제초제를 들이마셔 입원했다. 3번 환자는 불명열에 시달리다 입원했는데 본인 말에 의하면 무병이라고 한다. 4번 환자는 당뇨병 환자. 이 네 사람과 그 주변 인물들이 서로 이렇게 저렇게 엮여지는데, 독자만 알 뿐 책 속의 이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는 설정이다.

불명열 여자는 모른다. 수천만 년의 전생과 억겁의 후생보다도 더욱 아득하고 고단한 이 짧은 현생의 삶. 얽히고설킨 애등의 끈을 놓지 않는 용기만이 거세고 날카로워 손바닥이 갈가리 찢겨도 절대로 놓을 수 없다는 오기만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단 하나의 길이라는 사실.

살아내기 위해 부려야하는 '오기'란 사소하게 부리는 '오기'를 우습게 한다.

 

<내 창가에 기르는 꽃>

4번 침상의 당뇨병 환자의 아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어머니가 입원하고 있는 병원에 문병을 가던 중 예쁘고 날씬하진 않지만 사랑스러워 보이는 아가씨를 우연히 버스에서 도와준 인연으로 능력이 뛰어나고 멋지진 않지만 착하고 순한 심성을 가진 이 남자는 아가씨와 하루 저녁 시간을 함께 한다.

자기 엄마는 곧 나이 많은 노인과 재혼을 할 예정이라고 말하는 이 아가씨 엄마의 재혼 상대는 이 남자 엄마와 한 병실에 입원해있는 1번 침상 환자의 남편이다.

 

<당신의 저녁 시간>

가족으로 묶여 있다는 것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기도 하지만 끔찍한 족쇄가 되기도 한다. 한사람이 넘어졌을 때 이미 비틀거리고 있던 다른 가족도 연달아 넘어지게 되고 다시 일어날 수 있기란 좀처럼 힘들다. 몰락하는 가족 이야기. 몰락의 시초를 따져보니 결국 윗대의 윗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 끔찍하다.

 

<달빛 고양이>

1번 침상의 뇌졸중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의 아들 이야기이다. 고등학생이지만 엄마 모르게 중국집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중국집 단골 손님인 여자 아나운서가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것을 보고 그녀를 보호해주겠다는 생각에 집까지 데려다 주게 되고, 쓰러져 잠이 든 여자 집 베란다에서 싱숭생숭해진 그는 달을 바라보며 우주비행사가 되는 미래를 그려본다. 우연히 여자의 실상을 알게 된후 자기의 꿈이 박살나는 것을 느끼며 달은 이제 푸근하고 낭만적인 달이 아니라 있으나마나, 쓸데 없는 달일 뿐이다.

 

<성주 (城主)>

이번엔 뇌졸중 환자의 남편 이야기이다. 80 넘은 나이, 전직 의사인 그는 간병인을 붙여 억지로 생명을 연장시키며 의미없이 7년째 병상에 누워 있는 아내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 없다 생각하고 다른 젊은 여자와 재혼을 하려고 한다.

고생만 하다가 무언가 알만 하니까 나이 듦이 억울하다는 생각에 차라리 태어날 때 늙은이로 태어나 나이를 먹을 수록 젊어지고 어려지는 식으로 삶이 진행되면 훨씬 낫지 않을까, 자기 혼자 상상에 빠져 있는 동안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수술에 동의를 해줄 가족을 찾고 있고 자기 집은 불타고 있는지도 모른다.

8살 아들을 학교에 보내기보다는 푸줏간 막일을 시키려고 끌고 가던 아버지와 묵묵히 보고만 있던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회한. 그것이 이 집안의 몰락의 시초였을까.

 

<소설쓰는 밤>

앞의 이야기들보다 더 오싹하게 하는 것이 맨 뒤에 숨어 있었다. 느닷없이 소설가로 등장하는 40대 남자의 정체를 맨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 알게 되는 순간. 이야기는 다시 처음의 병실로 돌아오고, 이 괴이함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해보려니 좀 더 머리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사람이 사는 모습이 참으로 질척질척, 서글프다. 바로 당신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지만 막상 그 우리 속의 '나'의 이야기라고는 선뜻 말하기 어려운 것이 인지상정이겠지. 겉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삶 속에, 즉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공연과 다르게 무대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속사정을 우리는 굳이 알고 싶어하지 않다가 어느 새 내가 그 무대 뒤의 인물들 속에 나도 포함되어 있음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이 세상을 포기하고 싶어질까? 아니면 더 삶에 대해 겸손해지고 여물수 있을까.

그 답을 위의 인용문에서 찾는다. '꼬리에게 질 수는 없어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등단도 늦게한 편이고 작품도 아주 드문드문 내는 작가이다. 이 책이 나온 것이 2006년이니 곧 다음 소설이 나오지 않을까. 우리가 모르는 무대 뒤의 어떤 면을 또 보여주게 될지 기대해본다. 긴장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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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2-16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작가 이런 소설이 있군요. 담아갑니다.^^
조용한 일요일 저녁이에요. 편히 보내세요, 나인님.

hnine 2012-12-16 19:24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언제 기회 되실때 이 작가의 책을 꼭 읽어보시길 권해드려요. 좋다 안좋다를 떠나서 한번 읽어볼만하다고 생각이 들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