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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옥이 ㅣ 상상의힘 청소년문고 1
이창숙 지음, 김재홍 그림 / 상상의힘 / 2012년 9월
평점 :
남들도 그랬을까? 이 작가에 대해 전혀 아는바가 없었던 때였는데도 이 책의 표지와 제목을 보는 순간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 읽게 되리란 예감이 들었었다.
그러다가 지난 주, 구독하고 있는 동시잡지에서 이 작가의 동시를 읽게 되었다.
프라이드 치킨
아빠도 없는데 외상값은 뭐하러 갚어?
동생 말에 할머니는 물끄러미 우리 둘을 바라보다가
말 없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아빠 친구인 읍내 치킨집 사장 종규 아저씨도
눈이 빨개져서 안 받겠다고 하는데
할머니는 기어코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몇 장을
탁자에 놓았다
치킨 냄새에 푹 빠진 동생을 본 할머니는
손을 들고 크게 외쳤다
종규야, 여 프라이도 치킨 한 마리 튀겨 도
우리 세이 마 그거 묵고 심내서 살란다
치킨 집 창문으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아빠는 하늘에서도 술을 먹고 있을까
(이창숙 '프라이드 치킨' 全文)
금방 페이지를 넘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시를 쓴 사람이 내가 언젠가 찜 해놓았던 책 '무옥이'의 작가라는 것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렇게 이 작가의 작품과 인연이 시작되는구나, 생각하며 구입하여 읽게 된 책이다.
대단한 플롯이 있는 것도 아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한번 읽기 시작하니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1950년대 '허무옥'이라는 평범한 여자 아이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는데, 작가 어머니의 얘기라는 것을 작가 후기을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무옥이 얘기를 써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미루고 미루다가, 어머니가 세달 시한부 선고를 받고서 더 미룰 수 없음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는 이 책. 마지막 날 까지도 이 책을 위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는 작가 어머니. 벌써 가슴 뭉클해지니 어쩌나, 후기부터 읽은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공부가 하고 싶었지만 계집애가 학교는 다녀 무엇하느냐는 할머니의 반대로 다니다 말고, 집안 어른의 소개로 혼인을 하지만 식만 치르었을 뿐 결혼 생활이란 겪어보지도 못한채 시집살이만 고되게 하는 무옥이. 유일한 즐거움은 혼자 깨우친 한글로 '박씨부인전', '사씨남정기' 같은 이야기책을 읽는 것이었다. 책을 읽으며, 책 속 주인공이지만 다른 사람과 그렇게라도 소통하며 기쁨을 찾는 무옥이가 왜 남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책에서 얻는 큰 위로이자 힘이 아닐까 한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이 들때, 자신이 받고 있는 부당한 대우가 견디기 힘들때, 당장 박차고 뛰쳐나올 용기보다는 꾹꾹 참고 견딜때까지 견디는 편이었던 무옥이.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견디기만 하고 끝나는 인생을 살았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결정적인 순간에 무옥이는 결단을 내리고 행동에 옮길 줄 알았다.
1950년대라고 해도 여자가 학교 좀 안 다니면 어떠냐고 할 정도로 의식이 그 정도 수준이었을 때 열 여덟이라는 나이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서 길을 나서는 무옥이는 요즘으로 보자면 혼자 다른 나라로 오르는 비행기에 오르는 것 보다 더한 강단이 있고 자신의 삶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는 행동을 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개인적인 꿈 뿐 아니라 사회의 움직임에도 눈과 귀를 열고 대응할 수 있었던 무옥이. 그 조용하지만 강한 움직임이 읽는 사람의 마음을 크고 깊게 울린다.
본인 혹은 가족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쓰게 되면 자칫 늘어지고 쓰는 사람은 못알아차리는 군더더기가 많이 붙는 경우가 많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가는 그런 함정을 알고 피해 갔다. 좋은 점은 살리고 함정은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작가의 능력, 그리고 노력이라고 본다.
이 작가의 이전 작품을 검색해보았다. 이 책도 읽어야겠다.
- 2012.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