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곰스크로 가는 기차 (양장)
프리츠 오르트만 지음, 안병률 옮김, 최규석 그림 / 북인더갭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그는 평생을 꿈꾸던 곰스크에 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늙어가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포기 내지는 깨달아 간다. 나도 처음엔 주인공의 그 읊조림에 공감하고 동감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나서도 어느 새 내 머리 속에 책 내용이 다시 들어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하는 사이에 조금씩 다른 생각들의 씨앗이 자리잡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곰스크에 갈 수도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오로지 그 목적으로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마침내 기다리던 곰스크행 기차에 올랐다가 왜 다시 내려야 했을까. 그래야만 했을까? 무거운 안락의자를 기어이 끌어내고 있는 아내를 보며, 아내를 두고 가는 한이 있어도 가고야 말거라는 생각을 포기하고 자기 발로 기차에서 내려오는 대신, 그냥 그대로 곰스크를 향해 갈 수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선택의 순간에 기차에서 내려오는 쪽을 택하겠지만 이 세상에는 그냥 기차에 탄채 자기가 가고 싶던 곳으로 향하는 사람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물론 극소수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 세상은 기차에서 내리고 마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보다, 그대로 그들만의 곰스크 행을 감행하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뻗어가고, 나는 슬퍼지기 시작했다. 이 생각을 더 가지치기 못한 상태에서 다음 글들을 읽어보지만 곰스크만한 영향력을 받지 못한다. 그다지 마음에 크게 들어오지 않는다. <배는 북서쪽으로> 같은 글만 해도 주제가 너무 뻔히 드러나지 않는가. 목적지와 방향키의 불확실성 속에 움직이는 배를 타고 가야하는 우리의 삶. 뛰어내릴 수도 없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따져 물을 마땅한 상대도 없는 이 오리무중의 삶.
읽으면서 얼마전에 읽었던 샐린저의 <아홉 가지 이야기>가 연상되었던 것은 단순히 단편 모음이라는 책의 구성 방식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인생을 보는 관점이 어딘지 모르게 비슷해 보였다고 할까. 약간 방관적인 입장, 중심에서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인생이라기 보다 주변에서 관조하는 입장. 하지만 오르트만은 그런 점에 있어서 샐린저보다 고단수는 아닌 것 같다는 내 멋대로의 생각.
제목의 독일어 전치사 nach (Reise nach Gomsk) 를 보니, 그 옛날, 고등학교 2학년 독일어 시간에 nach와 zu가 얼핏 생각하기엔 비슷한 뜻 같지만 얼마나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설명해주시던 독일어 선생님도 생각난다.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되신.
곰스크.
언젠가 꼭 가고 말리라는 그 곰스크 행을 목적으로, 또는 못 이룬 꿈을 위로받을 안락의자를 목적으로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이 있으라. 그 속에 질펀히 섞이지 못하고 온갖 복잡한 시선으로 구경만 하고 있는 나 자신은 차라리 계속 그렇게 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