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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란티스야, 잘 가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시인으로만 알고 있었기에 이 책의 저자 이름을 처음 본 순간 그 허 수경 시인의 작품 맞는지 확인을 해야했다. 알고 보니 저자는 시만 쓴 것이 아니라 이미 소설도 에세이도 펴낸 경력이 있었다. 이 책은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장편 소설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소위 말하는 청소년 소설, 성장 소설이라고 해두자.
제목의 '아틀란티스'는 알다시피 사라진 대륙의 이름. 이 책에서는 아이들이 그리는 이상적인 세상, 앞으로 꿈꾸는 세상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러니까 현재의 불만족에 바탕하여 상상 속에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에 현재에는 있을 수 없는, 허상인 것이다. 하지만 그 '허상'이 현재를 견디고 계속되게 해준다.
시청 공무원인 아버지와 미모가 뛰어난 엄마를 두고 있는 중학교 2학년 경실이. 학년이 시작된 첫 날 일기장을 한권 사서 대화체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안녕, 일기장아. 내 이름은 미미야' 로 시작하는. 경실이라는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안들어 '미미'라고 고쳐서 소개하고는 이후로 자신을 계속 그렇게 지칭한다. 맨 마지막 장 다시 경실이로 돌아오기로 하기까지.
바깥 일 외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무뚝뚝한 아빠와, 역시 밖으로 나돌며 따뜻한 밥상 한번 차려주기를 가뭄에 콩나듯 하는 엄마 밑에서 경실이는 외롭다. 그 외롭고 허전함을 먹는 것으로 채운다. 동네 단골 찐빵 집에서 파는, 달콤한 앙꼬가 들어있는 찐빵을 먹으며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동안 무섭게 찐 살은 학교에서, 동네에서 눈총을 받고 수근거림을 듣기 일쑤이지만 먹기를 멈추지 못하고 갈수록 더욱 열등감게 빠져가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 또래의 예쁘장한 여자 아이가 집에 들어와 함께 살게 되는 일이 생기고, 놀랍게도 그날부터 경실이의 엄마는 따뜻한 밥상을 차리기 시작한다.
정우와 나는 가방을 방에다 두고 부엌으로 갔지. 둥그런 상위에 올라온 여러 가지 반찬에다 따뜻한 국을 보자 가슴이 뛰었어. 이거, 진짜 집이네! (77쪽)
전혀 친해질 수 없을 것 같던 그 둘의 관계는 한 방을 쓰며 서로 의지하고 마음을 털어놓는 사이가 되고, 밤마다 자기의 꿈을 담아 아틀란티스라는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노트에 끄적거리며 그 순간뿐이지만 외로움과 열등감을 이겨간다, 아니 잊는다.
이야기를 짓다보모 잡생각이 싹 달아난다 아이가. 새로 시집간 엄마 생각도 안 나고, 멸칫 국숫집 생각도 안 나고. (82쪽)
아마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이유로 어딘가에 끄적거리는 글을 쓰기 시작하지 않나 싶다.
학교에서 우연히 가담하게 된 독서클럽은 경실이의 또하나의 낙이었는데 어쩌다가 1970년대 후반이라는 책 속의 시대 상황에 어울리는 오해를 받게 되고,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까지 받게 되는 일을 겪으면서, 그리고 아버지의 숨겨진 비리를 알게 되면서, 경실이는 그 동안 자신을 붙잡아 주던 독서 클럽과 헤어지고, 그 친구들과 헤어지고, 자신의 허기를 채워주던 찐빵집과도 헤어진다. 비리와 허위를 경험하며 자신이 꿈꾸던 아틀란티스, 허공 속에 열심히 세우고 있던 그 나라라와도 이별하기로 한다.
살면서 우리는 몇 차례 자신만의 아틀란티스를 짓기도 하고, 또 허물기도 한다. 비록 현실에 없는 세계이지만 그 아틀란티스를 짓고 또 허물어야 할 이유는 항상 있다. 내가 원하는 세계를 꿈꾸고 그에 가까와 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살아가는 힘이 되고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면, 유효기간이 지났다는 느낌이 왔을 때는 또 기꺼이 그것과 '잘 가' 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이 책의 주인공 미미, 아니 경실이가 그런 것처럼.
이야기는 지루하지 않게 술술 읽혔지만, 수기 형식에서 벗어나 독특한 구성이 들어간 문학성으로 여물었다고 보기에는 좀 아쉬운 감이 있어 별 세개로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