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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 김선주 세상 이야기
김선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6월
평점 :
이 책을 주문하면서 제목의 '예의'에 대해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해주신 말씀이 기억난다고 따로 페이퍼에 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예의에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거든, 내가 그렇게 했을 때 다른 사람이 불편을 느낄지 생각해보면 된다고, 다른 사람이 나로 하여금 불편하지 않게 하는 것이 예의의 기본이라고.
예의란 폼으로, 겉치레로, 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다. 누가 보나 안보나 상관없이 나의 생각에, 나의 행동에 배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거의 처음으로 개인의 수준에서가 아닌 사회적 수준에서의 예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것 같다. 언론인으로 사회에 첫발을 디뎌 수십 년 언론인으로서 살아온 저자가 하는 말은 이전에 그를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와 상관없이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4.19와 5.16을 현장에서 본 세대이고 유신의 물결을 사회 생활을 하며 겪어 낸 세대, 나와 거의 20년 나이 차이가 나는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기성세대 중의 기성세대, 한국 사회의 관습적인 폐해에 본의든 타의든 잘 적응되어 있는 사람 아닐까 생각했었다. 책장을 넘겨가면서 조금씩 이런 선입관의 막이 벗겨져갔다. 이미지를 걷어내고 나면 실체가 보인다고 그녀는 책 속에서 말한다. 이미지가 중요한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애쓰면서 또 한편 그 이미지를 걷어내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어찌 그녀의 말에 모두 찬성할 수 있으랴마는 고개를 갸우뚱한 것보다는 끄덕이며 읽은 지면이 훨씬 많았음, 그리고 은퇴했긴 하지만 이렇게 솔직하게 써도 되나 잠시 읽는 내가 멈찟한 순간이 있었음을 얘기해야겠다. 북한의 핵실험은 위험한 도박이지만 한편으론 나 좀 살려달라는 단말마의 비명이라는 것, 서른 살이 되었는데도 직업이 없다면 당장 내일부터 파출부라도 하기 바란다고, 아니면 집에서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해서 밥값을 해야 한다는 주장, 즉 경제적 독립 없이 정신적 독립이란 웃기는 소리라는 것이다. 전업 주부라면 남편 수입의 반은 당신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는 말이 통용되는 사회일 수 있을까? 절대 자식과 남편에게 목매지 말라는 말은, 남편은 몰라도 자식을 위해 다른 것은 자연히 뒤로 밀어놓으며 10년 정도 살아보고 이제서 내 입에서 겨우 나오려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소비적 주체가 아니라 경제적 주체로 살으라는, 주부들에게 하는 말에 대해서는 별로 따끔하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 책의 제목이 되기도 한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라는 글에서 저자는 제때 이별할 수 있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하는데 내가 밑줄을 그은 이유는 이것이 남녀 사이의 사랑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는데 있다. 남녀 사이 사랑만이 사랑은 아니다. 직업과 학문, 예술에 걸었던 열정도 사랑이다. 나라와 겨레, 혹은 어떤 이상을 위해 뭉쳤던 뜨거운 순간들도 사랑이다. 사회적 이슈에 몸과 마음이 아플 정도로 헌신했던 터질 것 같은 순간들도 사랑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런 순간들을 뒤로하고 헤어져야 할 때가 온다. 사랑의 순간이 뜨거웠을수록 이별의 고통은 크다. 왜 사람들은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사랑의 순간들까지도 훼손하는 것일까? (193쪽) 내가 한동안 절대절명이라고 부둥켜 안고 있던 것들과도 언젠가 이별의 순간이 온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토록 목숨을 다해 사랑하던 것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노엄 촘스키의 주장에 찬성하고 나오는 저자에 대한 독자의 생각은 어떠할지. MB정부에 대한 시종일관 비판적인 시각, 기독교에 대한 따끔한 이견에 대한 독자의 이견들에 대해 모르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며, '수능 350점 이하만 읽을 것'이라는 제목의 글은 잘 기억했다가 내 아이에게도 언젠가 해주고 싶은 말이다. 최진실 자살 원인을 인터넷의 악성 댓글로 몰아가는 것은 정치적인 이유라고, 그것을 빌미로 인터넷에 족쇠를 채우겠다는 것은 자신들만이 언론과 여론을 독점하는 면허를 갖겠다는 것이라고 잘라말하는 소신 (314쪽), 이혼보다는 실험 동거가 몇배 낫다는 글에 대해서는 나 역시 평소에 주장해오던 바, 120% 찬성한다.
읽다 보면 다소 상투적이고 식상한 대목도 없지 않다. 하지만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견지 역시 그녀가 독자에게 주고 있다. 사랑때문에 우울하게 지내고 있을 많은 여성들을 위해 우울증에 시달리기 보다는 맘에 드는 남자가 눈에 뜨이면 망설이지 말고 다가설 각오를 하라면서 혹시 그것이 해피 엔딩이 아니더라도 우울증으로 밤마다 술을 마시며 사경을 헤매며 자살 충동까지 느끼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다. 남의 시선이나 소문을 무릅쓰고 자신의 인격과 인생을 걸고 용기를 내는 것, 그리고 살아내는 것이 삶에 대한 정직한 태도라고 믿는다라는 (315쪽), 내가 이 책에서 제일 맘에 드는 구절이었다. 힘들다 여겨지는 순간 거기에 휘말리거나 더 큰 것을 포기해버리려 하지 말고 어떻게든 벗어날 방도를 나름대로 찾길 바란다는 것은 그녀가 한 살이라도 어린 인생 후배들에게 주는 뼈있는 조언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에서 '김선주학교' 라고 검색해서 들어가보라. 그녀는 당당히 이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다. 아직도 정신이 굳지 않고 사는, 후배들이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여성 언론인이라는 그녀를 그곳에서 더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