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과 같이 의학이 발전한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전염병'이라는 것이 풍궐하고 있다. 최근의 신종 플루에서부터 광우병, 구제역, 조류 독감에 이르기까지.
한번 이런 병이 돌기 시작하면 사람들에게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고 이것보다 더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문제는 없다. 사람들의 모든 의식과 행동을 지배하는 이슈가 되어버린다.
작가는 최근의 이런 일들에서 이 작품의 모티브를 얻었을까?
아내와 이혼하고 표지의 소개처럼 절대고독의 한 남자가 그 고독을 헤치고 다시 시작할 마음으로 직업상 파견된 국가는 전염병이 유행처럼 퍼지고 있는 상황, 남자는 공항에서부터 쉽게 입국 허가를 받지 못한채 검사대에 오른다. 당장 출근해야 할 회사에서조차 출근을 보류당한채 타국에서 방치되어 있는 그는 불안하기만 하다. 전염병의 뚜렷한 원인을 알 수 없는 가운데 수시로 뿌려대는 소독약,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거리, 방역복이 일상복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복장, 검사 결과에 따라 외부 출입이 제한되고 음식도 배급되어지는 상황. 거리에 넘쳐 나는 쓰레기, 숨을 쉬는 이상 피할 수 없이 맡아야 하는 악취등, 아는 사람 하나 없고 말도 잘 안 통하는 사회에서 갖혀 지내는 남자의 상황은 이후 계속 등장하는 쥐의 생활과 다를 바가 없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살아갈 수가 있나 하며 읽다 보니 어찌 보면 이렇게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상황은 어차피 하나의 상징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 힘으로 어찌 못하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갈피를 못잡고, 사람을 피하면서 동시에 절대고독에 괴로와하는 모순 속에 지내는, 어디에 희망을 걸어야하나 그것 조차 불투명한 상황, 그 속에서 무제한 기간을 버텨내야 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이랄까. 작가는 그런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혼자 추측해본다.
작가가 그린 이 사회의 모습을 나타낸 한 구절을 예로써 옮겨본다.

   
  몰입해서 보려고 해도 뉴스는 광고로 자주 중단되었다. 우울하고 암울한 화면과 달리, 우울증의 전구증상이라도 되듯 광고는 들뜬 유머 일색이었다. 죽음을 전하는 화면 다음에 이어진 광고에서 한 사내가 신나서 죽겠다는 얼굴로 거품이 가득 인 맥주를 시원하게 마셨다. 광고가 끝나면 다시 화면이 바뀌어 아나운서가 굳은 표정으로 소식을 전하고, 잠시 후에는 다시 똑같은 맥주 광고가 이어지는 식이었다. 세계 최초로 개발된 알코올 0도라는 맥주였다. 도대체 알코올도 없는 맥주를 왜 마셔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그의 생각과 상관없이 아무리 마셔도 절대 취하지 않는다는 카피가 광고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는 신기원의 발명품인 듯 들뜬, 알코올 0도의 맥주 탄생을 알리는 광고와 종말을 예보하듯 누군가의 사망소식을 전하는 암울한 뉴스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43쪽)  
   

그는 간간히 출국 전의 일들을 회상한다. 아내에 대한 그의 의심으로 이혼까지 가게 되었고, 그 아내를 그리워한다. 아니, 그녀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로 인해 제공되던, 함께 나란히 누워 누군가 내 옆에 있음을 느끼며 그나마 절대 고독 상태를 잠시 잊을 수 있던 그 시간을 그리워한다. 그런 아내를 출국 전 남자는 어떻게 하고 왔던가.
전염병 감염자로 의심받게 되자 아파트를 탈출하여 쓰레기 더미 가득찬 공원의 부랑자 생활을 하며 쓰레기를 뒤져서 먹고 사는 생활을 하기도 하고, 쥐가 들끓는 하수구 생활을 하기도 한다.

   
  그는 여전히 쥐가 무섭고 두려웠다. 처음에는 자신이 쥐와 같은 처지라는 게 무서웠고 나중에는 쥐를 잡을 때에만 쥐와 같은 처지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느끼게 되어, 그 안도감 때문에 틈나는 대로 쥐를 잡으려고 하는 게 무서웠다. 쥐 한마리가 이끈 우연의 행보가 두려웠고, 그 행보를 원망하듯 어떤 독한 약이나 험한 매질에도 죽지 않는 쥐를 끝끝내 죽이고 싶어하는 자신이 무서웠다. (228쪽)  
   

쥐와 남자의 관계를 통해 남자의 처지와 심리를 매우 잘 표현한 구절이라고 생각되는데, 이 작품 여기 저기에서 주인공 남자의 생활은 쥐의 생활사에 많이 비유되어 그려지고 있다. 실제로 쥐의 생활사가 작품 전체에 걸쳐 무척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프란체스코 산토얀니의 <쥐와 인간>, 로버트 설리번의 <쥐들> 을 참고했다는 각주가 붙어있기도 하다.
전염병에 감염되었다고 의심되는 개체는 가차없이 소각되어 지며 그 결과로 남는 것은 회색의 '', 살아있는 개체에 대한 살생 행위의 흔적으로 남는 피의 '빨강'. 바로 이 책의 제목 '재와 빨강'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인간이 인간의 능력으로 대처하기 어려운 상황으로서 신종 전염병이라는 속수무책의 상황을 설정하고, 거기에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소외 현상을 접목시켜 생길 수 있는 이야기를 절묘하게 만들어나갔다. 소설 속의 가상적인 상황이라고 하기에는 우리에게 전염병 시대는 먼먼 옛이야기가 아님을 최근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때문에 읽는 독자로서 실감 이상의 효과가 있었다. 다만, 읽는 동안 어딘지 이야기의 흐름이 일관적으로 흐르지 않고 산만한 느낌이 들어 읽다가 자주 멈추게 되기도 했었다. 그점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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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4-11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의 제목을 보니 까뮈의 "페스트"가 떠오르네요. 저도 이 소설을 샀는데 (편혜영소설은 처음이구요), 아직 읽기 전이예요. 그나저나, 리뷰를 참 부지런히 많이 쓰시네요. 대단하세요...

hnine 2010-04-11 21:32   좋아요 0 | URL
저도 편혜영의 소설로 처음 읽었답니다. 한번 읽어보실만 해요.
책을 읽고 나면 좋았거나 별로였거나 어쨌든 기록으로 남기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열심히 리뷰를 올리긴 합니다. 또 요즘은 그 낙으로 사는 것 같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