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으로 산다는 것
김혜남 지음 / 갤리온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행복은 오히려 덜어냄으로써 찾아온다.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욕심을 덜어내는 것, 나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를 포기하는 것, 세상은 이래야 하고 나는 이래야 된다는 규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나를 짓누르는 과거의 무게를 조금 덜어내고 나 자신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조금 덜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아마 이책에 대한 리뷰는 인용문이 대부분을 차지할 것 같다. 밑줄긋기 형식으로 남길까 하다가, 내 의견도 덧붙여 남기고 싶을 것 같아 리뷰로 쓰기로 했다. )

이 책을 읽기 시작하고서 제일 처음 밑줄을 그은 부분이다. 행복은 무언가를 하나 더 가질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덜어낼 때, 벗어날 때 찾아온다는 말이 와닿아서이다.
  

 

   
  그대의 기쁨은 가면을 벗은 그대의 슬픔.
그대의 웃음이 떠오르는 바로 그 우물이
때로는 그대의 눈물로 채워지는 것

...
그대들 중의 어떤 이는 말한다.
기쁨은 슬픔보다 위대하다.
그러나 또 어떤 이는 말한다.
아니, 슬픔이야말로 위대한 것.
하지만 내 그대들에게 말하노라.
이들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
이들은 언제나 함께 오는 것.

 
   

 슬픔을 억누르지 말고 흘려보내라는 글에서는 칼릴 지브란의 시 <예언자>중 일부가 인용되고 있었다.
슬픔은 머물지  않는단다. 머무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고.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그 순간에조차 슬픔은 조금씩 흘러가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못 참는다고 한다.
슬픔이 찾아 오면 충분히 슬퍼하고, 그리고 놓아줄 것. 인생에는 슬퍼할 수 밖에 없는 요소가 구석구석 너무나 많으니까.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박 목월 시인의 <가정>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부모 노릇이 힘들다는 사람들에게 주는 저자의 조언은 '너무 좋은 부모가 되려고 애쓰지 마라'가 그 한가지였고, '아이는 아이의 길을 걷게 하라'가 또 한가지였다. 이 세상에 완벽한 부모는 없으며이상적인 부모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하다. 부모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줄수 있는 만큼의 사랑과,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하면 그 뿐, 머리 속에 꿈꾸는 부모처럼 되지 않는다고 해서 속상해할 것 없다는 말이다. 또한, 언젠가 자식은 부모 곁을 떠나게 되어 있고 이때 상처를 받는 쪽은 부모이기 마련이라고, 마치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놓으라는 듯이 쓰고 있다. 그러니 아이를 부모 뜻대로 끌고 가려고 하지 말라고. 부모와 아이 사이의 거리는, 키에르 케고르가 말한 어머니의 역할에 대한 글에서 말하는 딱 이 정도가 아닐까.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는 아이가 혼자 서는 법을 가르친다. 엄마는 아이로부터 떨어져서 언제라도 팔을 뻗을 준비가 되어 있지만 아이를 붙들어 주지는 않는다. 아이가 넘어질 듯이 뒤뚱거리면 엄마는 마치 아이를 잡아 주는 것처럼 허리를 구부린다. 그러면 아이는 자신이 혼자 걷는 게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게다가 자신을 보고 있는 엄마의 얼굴에서 아이는 격려와 칭찬을 읽는다. 아이는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별 어려움 없이 자신의 길을 가게 된다. 아이는 자신을 잡아 주지는 않지만 곁에 있는 엄마의 손을 의지하여 걷는다. 아이는 언제라도 필요하다면 엄마의 품이라는 피난처로 뛰어들 수 있다. 아이는 자신이 엄마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심치 않지만, 엄마 없이도 혼자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혼자 걷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주시하되 간섭하지 않기란, 스스로 자기의 길을 가게 하되 방관하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좀더 유쾌하게 나이들기 위해서는 자기를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나 이외의 남에게 관심을 갖고 이 세상을 향한 시선을 돌리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나이들면서 느끼는 의기소침과 외로움, 쓸쓸함, 허무한 감정들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다른 주제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자기 내부에서 생기는 감정을 억누르거나 부정하지 말고, 그냥 주시하고 흘러가게 두라고 한다. 그나마 '좀더' 유쾌하게 나이들기 위한 조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그 누구에게도 나이 들어감을 느껴가는 것은 유쾌한 감정은 아닌 것이다. 이 다음에 나오는 죽음에 관한 글에서도 본인 역시 죽음이 두려움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감정을 시인한 후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각한다. 죽음이 현재를 잠식하면 안되므로.
또한, 용서는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것까지 포함하지는 않는다는 말로서, 어른으로 산다는 것은 용서할 일이 마음 속에 쌓여가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용서하기 힘든 대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신만이 할 수 있는 용서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용서란 내 마음에서 분노와 미움을 떠나보내는 작업이라고 한다. 그래서 내 마음이 다시 고요를 되찾게 하는 작업 말이다. 그래서 더 이상 과거에 얽매여 나의 현재와 미래를 사장시키는 일이 진행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러니까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일이면서도 쉽지 않게 생각되는 과정
.  

강력한 주장으로 어떤 교훈적인 얘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담담한 마음으로, 저자 자신 역시 흔들림 많고, 남에게 상처도 많이 주고 또 받는 사람임을 드러내보이며 상당히 관조적으로 글을 써나갔다. 극복해라, 희망을 가져라, 목표를 가져라, 앞으로 나아가라, 뭐 이런 분위기라기 보다는, 기대를 덜어내라, 감정을 인정하고 그리고 지켜 보아라,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라, 혼자의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어른으로서 산다는 것은, 산 넘어 산이 아닌지. 높은 봉우리를 만나더라도 크게 호들갑을 떨지 않으며, 평평한 평지를 만나더라도, 다시 곧 오르막길에 부닥칠 것을 아는 것. 그렇게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것. 
크게 기뻐할 일도 크게 절망할 일도, 알고 보면 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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