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이가 당분간 우리집에 와서 지내기로 했단다. 이모의 자랑스런 아들 성운이는 나와 동갑내기, 공부도 잘하고 예의도 바르고,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긴, 성운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나무랄데 없는 아이였다. 이모 가족은 몇달 후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갈 예정이다. 다른 가족들도 그랬겠지만 특히 이모 가족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성운이는 아직 영어 회화 능력이 부족하여 영어 선생님인 우리 아빠에게 단기간 집중적으로 영어 특별 교육을 받기 위해 우리 집에서 당분간 지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게 누구였든 늘 또래 말상대가 그리웠던 나는 내색은 안했지만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일요일 오전, 이모와 함께 짐가방을 들고 성운이가 왔다. 현관을 들어오면서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성운이는 내 또래라고는 하나 어딘지 모르게 아이같지 않은 아이같았다. 나와 새운이에게는 짧게 "잘 있었니?" 인사를 하고는 곧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어디에 계신지를 물었다. 거하게 점심 상이 차려지고, 일하시는 아주머니에게도 " 잘 먹겠습니다." 라는 인사를 잊지 않더니 밥을 한톨도 남기지 않고 싹싹 비우는 성운이는 그저 어른들 마음에 쏙 드는 그 자체였다.  
성운이를 남겨 두고 이모께서는 댁으로 돌아가시고, 특별히 할일이 없는 주말 오후, 아빠의 첫 영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나이와 학년이 같다는 이유로 성운이와 아빠의 영어 공부에 나도 특별히 함께 할 수 있도록 허락이 떨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참석자로서 있을 뿐이고 아빠의 수업은 어디까지나 성운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아빠께서는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 교과서가 아닌, 회화 책을 준비하셔서 상황에 따라 이루어지는 대화를 중심으로 가르쳐 주셨다. 교과서 영어보다 훨씬 재미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성운이와 과일을 먹으며 물었다.
"너, 책을 그렇게 많이 읽는다면서?"
"응."
"무슨 책 읽어?"
"난 고전이 좋아. 세익스피어의 비극, 그리스 신화, 오딧세이는 여러 번 읽었고, 지와 사랑, 데미안, 아, 그리고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수레바퀴 아래서'인데, 혹시 읽었니?"
읽다니, 지금 성운이가 말한 것들 중에 내가 읽은 것은 단 한 권도 없었다.
"제목은 들어봤어. 아직 읽지는 못했고." 
아직 읽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읽을 것 같지 않은 책들을, 여러 번 읽었다는 성운이는 도대체 어떤 아이일까.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새운이가 묻는다.
"언니, 성운이 오빠랑 영어 공부 재미있어? 성운이 오빠 영어 잘 해?"
"뭐, 나야 들러리지 뭐. 영어 발음이 아주 나쁘진 않더라."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지만, 웬지 다음 영어 공부 시간이 기다려지고 있는 것은 왜일까? 건넌방에 짐을 풀어놓은 성운이도 지금 자려고 누웠을까? 아무리 남자 아이라지만 가족과 떨어져서 집생각이 나지는 않을까?  나는 잠이 오기는 커녕 눈이 더 말똥말똥해지면서 이 생각 저 생각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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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07-08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친아 성운이군요!^^

hnine 2009-07-08 12:03   좋아요 0 | URL
딱 어울리는 단어인데, 겨운이 싯점에서 쓰느라 사용하지 않았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