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 가지 않겠어
장 루이 푸르니에 지음, 김남주 옮김, 이형진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돌아온 꼬마 니꼴라라는 책 뒤의 옮긴이의 후기를 보고 잠시 착각했다. 중학교 때, 교보 문고에서 선 채로 꼬마 니꼴라 시리즈 몇 권을 읽어치울만큼 니꼴라 팬이었는데, 이 사람이 니꼴라의 저자였었나 해서이다. 니꼴라의 저자는 르네 고시니. 옮긴이의 의도는 마치 꼬마 니꼴라가 성인이 되어서 쓴 마냥 장난기와 웃음을 주는 내용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읽으며 조금도 안 웃기던걸. 오히려 나는 이런 분위기의 글을 읽으면 더 우울해진다. 페이소스 (pathos) 라고 할까. 연민의 감정에 푹 빠져 버리는 것이다. 그 누구에 대한 연민이랄 것도 없다. 그냥 사람 사는 모습에 대한 연민이다.
책의 시작과 끝부터 그렇지 않은가.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소년의 심정, 엄마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신부가 되겠다고 기도를 올리는 짧은 글로 시작한 책이, 정말 엄마를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내고 쓴 에필로그로 맺는다. 예전에 신부가 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 엄마가 영영 가버렸나 하면서.
저자가 주인공 '나'가 되어, 결국엔 인생의 씁쓸한 단면들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는가? 다만, 사는게 이렇더라 저렇더라 이야기를 마냥 풀어놓는 대신, 마치 남의 일인양 거리를 두고 말하는 특유의 방식, 소심하면서도 때로는 그 누구도 생각 못할 괴짜스러운 행동을 전혀 고민없이 저지르는 모습, 이런 것들이 이 사람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된다.
얇은 책이고, 실린 글 한 꼭지마다의 분량도 짤막하기만 하다.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하다.
<렘브란트가 내 장례식에 올테니까>라는 제목의 글에는, 사람이 모네의 그림 속에 머리를 집어 넣고 그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한 그림과 함께 이런 글이 있다; '나는 그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내 방에는 렘브란트, 와토, 모네, 터너의 그림이 담긴 엽서들이 붙어 있었다. 막연하나마 나는 그림이란 사람을 어딘가 다른 곳으로, 다른 세계로 데리고 가는 신비로운 그 무엇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림 보기에 대한 이 표현이 마음에 들어 몇 번씩 읽어 보았다.
제일 좋았던 글은 바로 다음의 이 글.

   
  바람이 세차게 불 때면 나는 자전거 페달을 밟지 않은 채 몇 킬로미터를 나아갔다. 나는 핸들을 놓고 손으로 망토 끝을 쥔 채 두 팔을 벌렸다. 그러면 마치 날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몸이 연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새처럼 날아서 무밭을 지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몸이 연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새처럼 무밭을 지나고 아르투아 언덕을 내려갔다. 나는 정말 하늘을 날고 있었다. 무밭에서는 라신의 작품을 읊조렸다. "우리 머리 위를 휘익 하고 지나가는 저 뱀들 같은 존재들이여." 보리 이삭 옆에서는 몰리에르를 낭독했다. "난 당신 친굽니다, 선생. 지금까지 난 당신 친구였어요. 하지만 당신의 태도를 보고 난 이제 더 이상 당신 친구가 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부패한 마음 가운데에서 내 자리를 찾지 않겠다구요." 나는 그렇게 혼자 연습을 했다. 나는 위대한 배우가 될 거야. 내 삶은 특별한 것이 되겠지. 바람에 실려 멀리, 아주아주 멀리 나아가리라.
 
   
읽고 있는 순간 하나의 광경이 눈 앞에 떠오르면서 그냥 무작정 자유가 느껴졌다. 
<셔츠를 살까, 레코드를 살까>에서 주인공은 엄마가 주신 용돈으로 셔츠와 레코드 중 어느 것을 살까 고민하다가, 베토벤의 피아노 콘체르토 4번을 들어보고는 전율이 흐를 정도로 행복하여 셔츠는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고 하면서, 셔츠를 입으면 내가 멋질지 더 이상 궁금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것은 모든 게 이미 멋졌기 때문이란다. 나중에 셔츠와 레코드 둘 다 살 수 있는 돈이 생겼을 때, 그건 생각만큼 좋지 않았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인지, 충분하지 않은가.
그의 신작 '아빠 어디가?'를 구입해놓고 먼저 이 책부터 읽었다. 그는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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