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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지 않은 삶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3월
평점 :
나에게 있어 최 영미는, 신간이 나오면 주저 없이 일단 사서 봐야 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것이 시집이든, 에세이이든, 소설이든.
'서른, 잔치는 끝났다' 보다 더 좋았던 그녀의 에세이 '화가의 우연한 시선'은 이후로 내게 그림을 대하는 마음을 더 각별하게 했으며, 이브 끌랭 (Yves Klein)과 로스코 (Mark Rothko) 라는 화가들을 좋아하게 된 것도 그녀의 에세이 '시대의 우울'을 읽으면서 아니었던가.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는 다 읽고도 수시로 꺼내어 아무 페이지나 들춰서 다시 읽곤 했다.
그녀의 세번째 시집 '돼지들에게'를 전과 같은 울림으로 읽지 못한데 이어, 오랜만에 새로 나온 이번 시집도 역시 기대하던 만큼이 아니어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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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들이 버린 神을
아시아의 어느 뭉툭한 손이 주워
확성기에 쑤셔넣는다
- '일요일 오전 11시' 全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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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살아 있는 그녀 특유의 sarcasm혹은 허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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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어두웠던 나라이기에
우주가 놀라게 불꽃을 터뜨리며
천문학적인 돈을 불살라야 했나
....(중략)...
천년제국의 후예들이, 무너진 건물더미에 깔린
시체들이 일어나 북을 두드린다.
땅을 흔들고 하늘을 찢으며
스모그를 걷어버린 오천 년의 북소리.
... (중략)...
얼마나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으면,
열강에 짓밟힌 백년의 치욕을
기나긴 장정의 굶주림을 보상받으려
오늘밤 미친 듯 쏟아내는가, 불쌍한 아시아여.
동경과 서울이 간 길을 베이징, 너도 피하지 못하는구나.
서양의 근대문물이 얼마나 신기했으면,
봉건제에서 포스트모던으로 건너뛰어
2008년의 첨단기술로 버무린 무협지를 과시하는가.
백년의 어둠을 깨고
허공을 불지르며 질주하는 열차에
나는 브레이크를 걸고 싶었다.
-'지상 최대의 쇼'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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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영미 시의 분위기를 그래도 제일 많이 느낄 수 있던 시.
남들이 흥분하는 일에 냉소를 보내며 바라보는 그녀 특유의 분위기 말이다.
오랜 만에 다시 내는 시집이어서, 처음 시집을 낼 때 만큼 떨렸다는 그녀의 인터뷰를 보았다. 그녀의 시에서 나는 아마 더 깊은 처절함을 읽고 싶은가보다. 여전히 열정히 퍼렇게 살아있는 그런 처절함은 그러나 더 이상 없었다. 지난 날에 대한 반추와, 아쉬움과, 목적한 대로 도착하지 못한 어떤 꿈들이 그 자리를 대신할 뿐. 지금 내가 이 시집을 읽고 난 느낌도 그와 비슷한 것은 그러니까 우연이 아닐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