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어린이집이나 놀이방 앞에서 엄마와 안떨어지려고 우는 아이의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면 그 자리에서 꼼짝을 못한다. 마음 한쪽이 아려온다고 해야하나.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잠깐 운동을 하고 돌아오던 중인 9시가 조금 넘은 시각.
어디선가 아이가 악을 쓰며 우는 소리가 들렸다.
둘러보니 길 옆에 있는 어린이집 문 앞에서, 너댓살 쯤 되어 보이는 한 아이가 안 들어가겠다고 목놓아 울고, 선생님은 달래서 데리고 들어가려고 하시고,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고 옆에서 속수무책으로 서 있는 사람은 아마 출근 길에 아이를 데려다주고 가려는 아이 아빠인가보다.
계속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어서 집을 향한 걸음을 옮기긴 했는데 어느새 눈에 눈물이 핑 돈다.
집 앞에 이르러 오늘도 비가 오려나 찌푸둥한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려니 우리 집 앞 감나무에 이렇게 감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것이다.

와, 언제 이렇게 열매를 맺었니?
애썼구나.
어제 읽은 책에서, 나무는 항상 그 자리에서 조용히 자신의 할 일을 해내고 있다고들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읽었다. 계절의 흐름에 맞춰 자신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꽃 피우고 열매 맺기 위해 치열하게 준비하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단풍이 드는 것이 그렇고, 낙엽이 떨어지는 것도 그렇다. 사람들이 어떠한 감상을 가지고 어떻게 보든, 나무는 생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자신의 몸의 일부였던 나뭇잎을 일부러 떨어뜨려 수분 손실을 줄여서 다가오는 겨울을 무사히 지낼 채비를 미리 하는 것이다.

우는 아이때문에 잠시 무거워졌던 마음을, 감나무를 보며 다시 일으켜세워본다.

사실 이렇게 어린이집이라도 다닐 수 있는 아이들은 그나마 나은 편일 수도 있다. 예전에 버스를 타고 출퇴근 하다 보면 항상 그 시간에 지나게 되는 곳에, 차들이 다니는 길 한 쪽에서 트럭에 과일을 쌓아 놓고 파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그 옆에는 걸음을 간신히 걷기 시작했을 것 같은 아이가 그 먼지 많은 길 가에서 엄마가 장사를 하는 동안 옆을 뱅뱅 돌며 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침 부터 장사를 끝내고 돌아가는 시간까지 거기서 그 아이는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살아내려고 버티는, 견디는 노력은 때로 눈물겨운 것. 그래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