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조나 레러 지음, 최애리.안시열 옮김 / 지호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예상하겠지만 프루스트에 관한 책은 아니다.
신경과학 실험실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저자가, 예술 각 분야에 이름난 여덟 사람을 들어, 그들의 작업이 어떻게 과학과 접목될 수 있는지 연관성을 탐구, 발견해낸 결과를 가지고 쓴 책이다. 월트 휘트먼, 영국의 여성 소설가 조지 엘리엇, 프랑스의 요리사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저자는 실제로 요리사로 일한 경험도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 폴 세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미국의 여성 시인이자 소설가 거트루드 스타인, 버지니아 울프 등이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그 여덟 명의 예술가이다.
월트 휘트먼은 시집 <풀잎>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의 시인.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이분법 적으로 구분하지 않으며, 육체와 영혼, 범속함과 심오함은 서로 이름만 다를 뿐 같은 것이라 보고, 영혼 못지 않게 '몸'의 중요성과 의미를 강조했다. 인간의 느낌이라는 것은 뇌와 그 외의 몸의 다른 부위 사이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감정이란 것도 육체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스스로 '과학적인 시인'이 되고 싶어했던 조지 엘리엇은 다윈의 진화론을 적극 지지했던 사람으로서, 진화론의 중심 개념중 하나인 유전적 변이, 무작위성을 들어, 이 세상은 정해진 답이 없고 우리 자신이 풀어가야할 문제라고 보았다. 우리의 상황 자체가 우리가 만들어가야할 길의 원재료를 제공하는 것이고, 마음이 자신을 바꾸는 능력이야말로 우리 자유의 원천이라는 그녀의 믿음에 공감이 간다.
맛의 정수를 찾고자 평생 노력했던 요리사 오귀스트 에스코피에는, 미각을 비롯한 우리의 감각은 경험과 기대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오류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현재의 느낌과 판단은 현재 있는 그대로 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경험) 미래의 (기대감)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 되겠다. 이 경험이라는 것을 과학이 풀 수 있던가. 경험은 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개인의 뇌는 개개인의 욕망에 따라 조율되어 있는 것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내게는 무척 난해했던, 그러나 20세기 문학의 하나의 큰 표석이 된 소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의식의 흐름' 이라는 그의 소설 기법에서도 알수 있듯이 기억, 의식, 직관 등을 중요시했던 사람이다. 기계론적 우주관을 맹렬히 비판했던 베르그 송 철학을 내면화한 최초의 예술가 중 한사람이었던 그는 현실이란 주관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가장 잘 이해되는 것이며 그 진실은 직관적으로 우리에게 포착된다고 하였다. 마들렌과 차를 먹는 동안 느끼는 감각에서 불러일으켜지는 직관적인 기억, 새로 일깨워지는 감각, 진실은 찻잔이 아닌 내 안에 있었다고 말하는 프루스트의 그 유명한 마들렌 일화도 함께 실려 있다. 기억은 뇌 속에 그냥 저장되어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회상하기 시작하는 순간, 새로운 모습으로 창조되기도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음에도 '눈으로는 충분치 않다. 생각의 필요가 있다.'라고 말한 폴 세잔. 우리의 인상은 해석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즉 본다는 것보이는 것을 창조하는 과정이라는 것. 회화는 더 이상 '카메라 옵스쿠라 (어둠 상자)'의 역할이 아니라, 즉 눈에 보이는 대상을 성실하게 재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아이디어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 세잔은 세상의 형태들이 무형의 혼잡으로 빠져 들어갈 때까지 오래오래 응시하고 해체하고 다시 드러나는 모습을 보려고 했다. 자신의 주관과 소신에 의해 이러한 새로운 시도를 던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보통 사람과 뛰어난 사람을 구분짓는 것 중의 하나 아닐까. 추상화의 발판을 마련한 세잔. 이후 회화나 조각에 그의 이런 생각이 미칠 막대한 영향을 그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실제로 몇몇 신경과학자들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그것이 뇌를 거쳐 비어 있는 망막에 상으로 맺혀 어떤 형상으로 인식되기 까지의 과정은, 세잔이 대상을 응시하고 해체하고 새로운 형태를 의식하는 과정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평안과 만족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불안과 고통을 느끼게 하기 위해 작곡하고 지휘했던 음악가라고 하는 편이 더 맞겠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화음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자 온갖 불협화음의 충돌로 이루어진 곡들을 작곡하고, 새로 태어나는 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음악을 만드는 데 있어서 단순히 새로운 음악적 패턴을 창조하는 데 머물지 않고, 이전 패턴들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음악을 통해 역설적인 철학을 표현한 최초의 작곡가이고, 청중이 무엇을 예견할지 예견했고, 그 예견한 것을 하나도 주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새로움의 불확실성을 싫어하게끔 설게되어 있는 우리 인간의 뇌, 신경학적 덫이라고도 표현되는 이러한 본성에 그는 아무도 이전에 경험하지 않았던 경험을 창조하려고 몸부림친 것이다. 책에 언급된, 뇌를 바꾸는 예술의 소리라는 표현은 그의 음악을, 그의 생각을 참 간단하지만 잘 표현한 말인것 같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기억이 나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미국의 여성 시인이자 소설가인데, 사실 작품을 실제로 읽어본 적은 없다. 그녀 역시 기존의 단어들의 조합 방식을 파괴하고, 문법을 파괴하여 어떤 새로운 의미를 전달하고자 문학적 실험을 시도하였다. 어떤 클리셰에 빠지지 않으려 애썼던  것 뿐 아니라 완전히 무의미한 문장을 써보려는 시도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읽는 사람에게 난해함을 던져줄 뿐이었음에도 그러한 작업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당시 통용되던 스키너의 행동주의에 반발하여, 우리의 언어 구조는 추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고 행동주의자들의 눈에는 앞뒤 안맞고우스꽝스러운 문장들에 지나지 않는 것들을 무궁무진하게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언어에 대한 선천적인 제약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그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싶었던, 자기만의 방에 우울하게 갖히기도 했던 그녀는 분열된 신경들의 교란 속에 정신 이상으로 병원을 드나들면서도 오히려 그 덕분에 마음에 대해 알게 된 것들, 그 변덕스러움과 다중성에 대해 그녀의 작품 속에 문학적 기법으로 표현했으며, 마음이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야릇한 조합이라고 보았다. 그녀는 '우리는 왜 분열되는가' 가 아니라 오히려 '왜 항상 분열되지 않는가' 하는 수수께끼를 마음 속에 지녔던 것 같다. 마음은 단절된 여러개의 조각들의 합이고, 분열된 것이며, 산만한 것이다. 인간은 이처럼 산만한 존재일 수 밖에 없고, 그 직접적인 증거는 뇌의 해부학상 구조를 들 수 있는데, 대뇌 피질이 하나의 두개골 속에 들어 있지만 좌반구와 우반구라는 두 개의 서로 일치하지 않는 덩어리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다. 복잡한 사물이나 대상을을 보고서 우리 뇌에서 인식하는 것은 한 가지가 아니며 두 가지 상반된 것을 동시에 느끼고 이것이 곧 우리의 느낌이라고. 즉 모든 두뇌에는 적어도 두 가지 상반된 마음들이 북적이고 있다는 것이다. 울프의  에세이 <길거리 쏘다니기> 중의 한 구절이다; '나는 여기 있나? 저기 있나? 아니면 진정한 자아는 이것이나 저것이 아니라 너무나 다양하고 방황하는 것이라, 우리가 그 소망들을 마음껏 달려 나가게 해둘 때에만 진실로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녀가 알고 싶었던 '자아'란 결국 환영이라는 것이 그녀의 최종적인 견해였다. 아무도 발견할 수 없는 불명료한 전체이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예술작품이며, 두뇌가 창조하는 허구일 뿐이라고. 이 결론에 도달하기 까지의 그녀의 고뇌가 그녀를 얼마나 힘들게 했을지 혼자 짐작이나 하고 있으려니, 진실은 허구로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허무함 한 자락이 밀려 온다.

과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책 속에서 저자는 말한다. 과학이 우리를 해체한다면, 예술은 우리를 다시 통합시켜 준다고. 과학과 예술은 이렇게 서로 합의를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학의 환원주의로 우리는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을 알았고, 궁금증에서 얼마나 헤어날 수 있었던가. 오히려 더 많은 의문을 만들어내게 되지 않았던가? 경험은 과학적 실험을 능가하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알고 찾고자 하는 자아는 객관적 사실로 취급될 수 없는 허구인 것을.
예술과 과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 둘은 어떻게 서로 인간 탐구에 공헌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이 두 문화의 상호 몰이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이런 문제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자 제3의 문화라는 것이 조성되어 일반 대중과 직접 의사 소통하는 과학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리차드 도킨스에서 브라이언 그린, E.O. 윌슨 등이 많은 공헌을 했다고 볼수 있다. 과연 이 제3의 문화가 예술과 과학이라는 두 문화가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충분히 견제해 줄수 있을 것인가. 제3의 문화란 서로 다른 분야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중적인 차원들의 공존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라야 한다고 이 책에서는 말하고 있고 공감하는 바이다. 예술은 물리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며, 시란 번역을 하면 상실되는 무엇이다. 신경과학은 뇌를 묘사하는데 유용하고, 예술은 우리의 실제 경험을 묘사하는데 유용하다. 현실을 묘사하는 여러 가지 다른 방식이 있으며 그 각각이 진리를 산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인문학과 과학 사이의 관계를 발견하려 하는 제4의 문화의 탄생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 자유로이 지식을 이식하며, 환원적 사실들을 (과학이 밝혀 놓은) 우리의 실제 경험과 연관시키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모든 것에 앞서 우선 인문학은 과학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져야 하고, 예술가들은 과학의 부름에 귀 기울여야 하며, 과학의 현실 묘사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동시에 과학은 자신의 진리가 유일한 진리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어떤 지식도 앎에 대한 독점권을 갖지 않는다면서.
이제 예술, 과학, 인문학, 그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연구 분야가 개척되고 있고, 기존의 없던 새로운 학문의 길이 조용히 만들어지고 있는 중임을 실감하겠다.

별점을 세개만 준것은 역시 번역의 매끄럽지 못함과, 여덟 편의 예가 주제와 꼭 들어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간간히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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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포토 2008-08-14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과학이 우리를 해체한다면, 예술은 우리를 다시 통합시켜 준다"
---> 아주 멋진 말씀!

hnine 2008-08-14 20:37   좋아요 0 | URL
읽기에 만만치 않았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