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지의 표본
오가와 요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수첩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박사가 사랑한 수식>, <슈거 타임> 다음으로 내가 읽은 세번째 오가와 요코의 책이다.
이 책에는 두 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표본실에서 일하는 젊은 아가씨가 화자인 '약지의 표본'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중년의 부인을 따라가다 알게 된 작은 이야기 방에 관한 '육각형의 작은 방' 이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도 그랬듯이, 오가와 요코는 우리 사회의 특별한 계층의 인물 보다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어디서나 있을 것 같은 평범하고 눈에 뜨이지 않는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택하길 좋아하는 것 같다. 표본실의 아가씨는 이전에 청량음료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기계의 실수로 약지 살점이 약간 떨어져 나가는 사고를 당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던 중 낡고 오래된 표본실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것을 시내를 지나던 길에 우연히 보고는 그곳에서 일하게 된다. 거기서 만나게 된 표본제작사 데시마루와 형성되는 미묘한 감정. 그가 주인공에게 벗지 말고 꼭 신고 있기를 당부한 그 구두의 의미는 무엇일까. 정신적으로 그에게서 벗어나지 말고 꼭 붙어 있으라는 암묵의 표현이 아닐지. 한번 신은 구두에 길들여지면 다른 구두가 낯설어진다. 그것은 그 구두를 오래 신고 있을수록 더하다. 이 표본실에서 제작하는 표본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생물 표본만이 아니다. 악보에 담긴 소리, 예전에 겪었던 일에 대한 추억, 아픔, 슬픔 등을 의뢰자의 요구에 따라 표본 기술사는 나름의 방법으로 그것들을 표본으로 제작하고 일련 번호를 붙여 표본실에 차곡차곡 정리하여 보관해 나간다.
여기서 우리는 표본으로 만든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잃고 싶지 않거나 잊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편, 소멸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마음에서 몰아내기 위한 방편이 아닐까. 주인공의 약지의 표본이 제작 되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사라졌듯이. 글에서 표본 제작을 의뢰한 사람들은 좀처럼 그 표본을 다시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봐도 그렇다.
뒤에 실린 '육각형의 작은 방' 또한 오가와 요코의 개성을 보여주는 글이라 하겠다. 아픈 등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니기 시작한 스포츠 클럽에서 우연히 만난 한 중년 여인, 역시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녀에게 알수 없이 끌리는 주인공. 특별한 이유없이 그녀를 따라가다가 뜻밖의 장소를 알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하듯이 어느 덧 자기도 그 기묘한 공간에 들어가 마음에 담긴 말을 쏟아 낸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엄연히 이용료까지 지불하면서  육각형의 작은 공간 속에 들어가서이다. 이 특이한 행위가 의미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생리적인 배설이 있듯이, 정신적인 배설도 있다. 표현되지 못하고 오랜 세월 사람들의 의식 속에 쌓여만 있던 것들은 어느 새 자신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모든 의식 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잠식하게 되는 단계까지 올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어떤 방식으로든지 밖으로 표출되어야 하는, 일종의 배설행위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주인공이 이제 그 육각형의 공간 속에서 편안함을 찾게 된 어느 날 홀연히 그곳은 눈 앞에서 사라지고. 주인공은 이제 스스로 자신만의 육각형의 방을 만들 수 있으리라. 그곳이 필요한 한계에 이르렀을때 그녀는 스스로 이야기방을 만들고 그곳에 들어가 그녀의 모든 어두움의 뭉텅이를 쏟아내리라.
우리의 어두운 의식의 세계를 털어놓아야 하는 대상은 이렇게 혼잣말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가보다.

'약지의 표본'이 프랑스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 것이 의외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졌다면 아마 화들짝 놀랐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