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십 세를 훨씬 넘기신 어머니는 간혹 한숨을 쉬시며 살아온 날들이 한바탕 꿈 같다거나 사는 일이 어린아이들의 소꿉놀이와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하신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엄마 노릇, 아빠 노릇, 아기 노릇을 하고 밥 먹고 잠자고 일하는 시늉을 하다가 해 저물고 어두워져 '아무개야, 그만 놀고 들어와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소꿉놀이 살림살이를 놀던 그대로 두고 각자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듯이, 이 세상에서 사는 일도 마찬가지로 한바탕 펼쳐놓고 살다가 어느 날 누군가의 부름에 놀던 것, 지녔던 것들을 그대로 놓아 두고 황황히 떠나가게 되는 것이라는 뜻일게다.-31쪽
마흔 살이란 앞만 보고 달려온 걸음 앞의 걸림돌이다. 설혹 잘못 들어선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도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다는 것, 인생의 성패는 이미 판가름 난 것이 아닌가라는 성급한 판단에 초조해지기도 하고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이제야 확연히 보이는가 하면 여념 없이 살아온 날들에의 반성과 검토, 게다가 한 인간으로서의 내가 무엇이며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실존적인 물음 앞에 피할 도리 없이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앞에 복병처럼 기다리고 있는 질병과 외로움의 종내 어느 날엔가 틀림없이 맞게 될 죽음-낯익고 친근한 모든 것과의 이별-역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40대가 되면 찾아올 거라고 기대했던 평화도 안도감도 앎도 없이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린 듯 어리둥절하고 당황스럽다.-39쪽
결국 소설 쓰기가 힘들다는 것은 삶이 힘들고 섣부르게 말하기에는 너무 복잡 미묘하다는 깨달음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63쪽
밤길을 혼자 걸어본 사람은 안다. 꽃피는 봄과 잎 무성한 여름, 스산한 가을과 얼어붙은 겨울, 달과 별과 바람이, 서로에게서 '저만치' 떨어져 서 있는 나무들이 저마다의 시간을 살고 있음을. 어둠 속에 조용히 서 있는 나무들은 우리에게 살아가라고, 세상은 아름답고 충분히 견딜 만하다고 나직이 말하며 사시사철 마파람에 문풍지 떨듯 펄럭이는 마음을 위무하며 잠재우는 듯하였다.-68쪽
통찰력이 없는 상상이란 잡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통찰력을 갖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성숙한 의식이 있어야 하고 성숙한 의식이란 또한 깊이 살아내기, 상식과 통념, 상투성을 깨고 뒤집어보는 물음과 시선, 본질에 대한 궁구가 따라야 하겠지요.-174쪽
죄 없는 아이들의 고통은 세상의 업이다. 그들이 누구라 해도, 어른이 되고 늙어간다 해도 어린아이 시절 입은 영혼의 깊은 상처는 세상 뭇 어미의 가슴에 슬픔의 형상으로 각인된다.-22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