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
공선옥 지음 / 창비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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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에도 싱싱한 오이와 상추와 딸기가 올라 있는 음식상을 바라보며 나는 불쾌감과 아울러 공포감을 느낀다. 한여름 먹을 거리인 오이가 한겨울에 생산되는 것은 모두 돈 때문이다. 한여름에 나는 먹을 거리를 한겨울에도 먹고자 하는 사람들 때문이다.(중략) 사람들은 이제 절대로 기다리지 않는다. 기다리는 대신 돈으로 사버리면 되는 것이다. 더위가 오기 전에 미리 더위를 돈으로 사서 즐기다가 막상 더위가 오면 또 추위를 돈 주고 사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다리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계절을 기다리지 않고, 사랑을 기다리지 않고, 세월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떡하든 나이보다 젊은 모습을 지니고자 애쓴다. 늙었다는 말을 듣기 싫어한다.
-70쪽

'나도 알고 보면 차암 예쁘고 괜찮고 아름다운 여잔데....'
내가 나에게 아름다움을 느낄 때 남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베푸는 아름다움이든 이기적인 아름다움이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여자는 아름답다. -171쪽

나는 그와 어떤 특별한 말을 주고받은 적도 없습니다. 그래도 그는 나에게 커다란 위로가 됩니다. 그는 내 속의 부처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마 그것도 모를 테지요. 자신이 누군가의 마음속에 들어가 커다란 위로가 되고 부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나 또한 누군가의 가슴속에 들어가 위로가 되고 부처가 될 수는 없을까요. 좀더 가난해지고 좀더 외로워지면 그럴 수 있을는지요. 하기사 태안사의 그는 가난과 외로움조차도 스스로 느끼지 않는 그저 '그'일 따름이었습니다. 가난과 외로움조차도 때로는 거추장스런 장신구일 수도 있겠습니다.-15쪽

생애의 어느 한때 한순간, 누구에게나 그 '한순간'이 있다. 가장 좋고 눈부신 한때. 그것은 자두나무의 유월처럼 짧을 수도 있고, 감나무의 가을처럼 조금 길 수도 있다. 짧든 길든, 그것은 그래도 누구에게나 한 때, 한순간이 된다. 좋은 시절은 아무리 길어도 짧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짧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57쪽

세상은 참 많이, 그리고 늘 '나쁜 것'들의 연속이었다. 나쁜 것들의 행렬 속에서 좋은 것의 도래를 열망하여 어느 한때, 좋은 한 시절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간절한 열망 끝에 오는 좋은 한 시절은 그 기다림과 그 열망의 시간들에 비해 너무나 짧다. 오죽하면 메뚜기도 한철이란 말이 생겨났겠는가.
그러나 좋은 한순간, 한때, 혹은 한 시절이 누구에게나, 기다리고 열망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오는 것만은 아닌가보다. 그야말로 그 인생의 어느 한순간에도 '좋은 한때' 한번 못보고 생을 마감하게 되는 지난한 생애들을 종종 보게 되니 말이다.
어느 죽음인들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있겠는가마는 평탄한 삶만을 살다 간 사람보다 산산하기만 한 생을 살았던 사람의 죽음 앞에서 가슴이 메어오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그 생애에서 뭔가를 이우려 하다가 끝끝내 이루지 못한 이의 죽음 앞에서는 울음조차도 사치스럽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울음이란, 슬픔이란 때로 얼마나 감정의 허영인 것이냐.-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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