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빨강의 자서전 - 시로 쓴 소설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평점 :
인터뷰를 하는 앤 카슨은 특이해 보였다. 인터뷰어의 질문에 대해 예상과 다른 위트 있는 대답을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인터뷰어는 웃음을 터뜨리는데 말하는 앤 카슨은 웃지 않았다. 올해 76세 된 저자가 몸으로 경험하고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는 수단으로 복싱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조금 아까 자료 화면 전체 내용을 다시 보고 알게 되었다. 작가는 2년 전 파킨슨 진단을 받았고 복싱의 시작은 의사의 추천에서 비롯 되었지만 점차 거기서 건강의 목적 외에도 사람들을 대하는 법을 해로 깨우치게 되었다고 한다.) 앤 카슨이란 작가에 대해 관심이 생겨가고 있던 중 구독하는 종이 신문 지면에서 그녀의 시가 소개된 것을 읽어보게 되었다. 한번 읽고 훅 들어오는 시는 아니었지만 오래 오래 생각나게 하는 시였다.
마침내 앤 카슨의 책을 처음 주문해서 읽어본 책이 '빨강의 자서전'이다. '녹스' 같은 책은 너무 두꺼웠고, 본격 시집은 이해하기 너무 어려울 것 같았고, 비교적 분량이 많지 않고 검색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책이라서 '빨강의 자서전'을 고르게 되었다.
시의 형식을 하고 있는 소설이라는데 읽어보니 단순히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문단의 형태 같은 것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서술 방식도 소설처럼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닌 장면 묘사 형식에 가까왔고, 시의 한 연이 끝나고 다음 연이 나오듯 장면 장면이 계속 바뀌어 가며 진행되는 형식을 하고 있었다.
이 책의 주인공을 꼽자면 게리온과 헤라클레스일텐데, 이 둘은 원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과 영웅의 이름이다. 제우스가 바람을 피워 낳은 자식인 헤라클레스를 미워한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헤라클레스를 미워하였고 해꼬지 하려는 여러 시도 중의 하나로 헤라클레스에게 광기를 일으키게 하여 헤라클레스로 하여금 자기 자식과 아내를 죽이는 일을 저지르게 한다. 이에 대한 벌로 헤라클레스는 12가지 과업을 수행해야 했고 그 12가지 과업중 하나가 소를 지키는 게리온에게 가서 그가 키우는 소떼를 빼앗아 오는 것이었다. 게리온을 찾아간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이 지키는 소를 탈취하는 과정에서 게리온을 죽이고 만다. 자기 임무를 하고 있었을 뿐인 게리온안데 헤라클레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하 줄거리 스포일러 포함)
이것이 그리스 신화중의 게리온과 헤라클레스 이야기이지만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에서 게리온은 14살, 헤라클레스는 16살의 소년일 뿐이다. 우연히 버스에서 헤라클레스를 보게 된 게리온은 단번에 사랑에 빠지고 만다. 헤라클레스와 같이 있고 싶고 그의 마음을 사고 싶고 그에 대한 생각을 하며 지내지만 헤라클레스는 무심하기만 하다. 게리온에게 못되게 구는 것은 아니지만 게리온과 어울리고 그와 잠자리까지 같이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뿐, 그 이상의 관심을 주지 않는다. 마음이 상한 게리온. 사랑이 시작될때 감정은 평안과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지 않은가. 불안, 슬픔, 자신의 내면 세계로의 침잠, 이 세상에 대한 탐구. 헤라클레스를 만나게 되고서 게리온의 삶의 세계는 몇 눈금 하강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57쪽). 더구나 게리온은 이제 14살의 소년이다. 그리고 빨강 날개를 옷 속에 숨키고 다니는 비밀까지 안고 사는 게리온이다.
그러는 가운데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을 떠나고 상심한 게리온은 집을 나와 사진을 찍으러 아르헨티나 어느 지방으로 떠난다.
거기서 게리온은 우연히 헤라클레스를 다시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앙카시라는 새로운 연인을 옆에 데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게리온과 잠자리를 함께 하는 헤라클레스. 그리고 이것을 알게 된 앙카시.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적어도 세사람이 얽혀 싸움이라도 한판 붙어버리는 흔한 스토리를 예상하진 않을 것이다.
결말이랄 것도 없다. 세사람은 함께 앙카시의 고향인 페루로 여행을 떠난다. 세사람은 과연 각각 무슨 생각을 하며 함께 여행을 떠난 것일까. 헤라클레스와 앙카시는 몰라도 최소한 게리온은 처음의 게리온에서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리온은 우연히 자기가 숨기고 살아온 빨간 날개의 의미를 새롭게 알아내게 되었고, 그 즈음 게리온의 날개의 존재를 알아차린 앙카시는 게리온에게 날개를 숨기지 말고 날개를 이용해서 날아볼 것을 권유한다.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의 날개의 존재도 모름)
중간 중간 이게 무슨 말인지, 무슨 의미인지 알수 없는 대목들이 많이 나오지만, 줄거리를 나름대로 꿰어나가다 보니 의미를 알게 되기도 하였다. 만난지 얼마 안되는 앙카시가 게리온의 날개를 발견하고 관심을 가지는 반면, 게리온을 훨씬 오래 알아온 헤라클레스는 그것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냥 지나친다. 헤라클레스가 게리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게리온의 일부였을 뿐이고 그것으로 되었던 것이다.
게리온은 궁금했다.
게리온은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선사시대 바위들을 바라보며 생각들에 대해 생각했다.
둘이 연인이었을 때도
게리온은 헤라클레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끔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라고 물었고
그때마다 자동차 범퍼에 붙이는 스티커나 몇 년 전 중국집에서 먹은 요리 같은
이상한 걸 생각하고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게리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헤라클레스는 단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었다.
그들 사이의 공간에 위험한 구름이 생겨났다.
게리온은 다시 그 구름 속으로 들어가선 안 된다는 걸 알았다.(219쪽)
갑자기 뭐가 확 달라지는 그런 대목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는 느낀다. 게리온은 이제 달라지고 있구나. 성장하고 있구나. 더 이상 자신의 날개를 숨기고 살지는 않겠구나. 헤라클레스의 사랑을 얻는 것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겠구나. 스스로 날아오를 준비를 하며 살겠구나.
그리스 신화 속의 게리온과 헤라클레스와 이 책에 나오는 게리온과 헤라클레스를 연관지어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꼭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신화에선 헤라클레스, 즉 영웅이 주인공이고 게리온은 영웅의 과업 수행용으로 잠깐 등장할 뿐이다. 물론 이런 게리온을 처음 주인공으로 끌어올린 사람은 앤 카슨이 처음은 아니고 스테시코로스라는 시인이었다. 앤 카슨은 이 스테시코로스의 시를 해석하던 중 그의 시 속에서 게리온을 새로이 보게 되었다.
잘 알려진 작품 속, 전형적인 역할과 특징으로 알려진 주인공와 상대역을 새롭게 해석하여 다시 쓰기 시도를 한 책들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백설공주를 계모의 입장에서 다시 쓴다든지 하는)
이 책은 그런 차원을 넘어섰다. 원전과 완전히 다른, 하지만 전혀 무관하지는 않은 이야기로 다시 탄생시킨 작품이다. 다시 쓰면 다른 존재가 된다. 다시 쓰는 차원이 기존의 다시 쓴 작품들의 수준을 넘어섰다.
---------------------------------------------------
노벨상 소식 듣고 나서 무엇을 할거냐는 물음에 대한 앤 카슨의 대답은 전화를 피하기 위해 숲속을 걷겠다는 것이었다.
"I'm going to hear the qui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