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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미친 사람들 - 카렐 차페크의 무시무시하게 멋진 스페인 여행기 ㅣ 흄세 에세이 6
카렐 차페크 지음, 이리나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9월
평점 :
카렐 차페크의 영국 여행기를 읽고 나니 스페인 여행기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체코 사람 카렐 차페크는 1932년 영국에 이어 스페인 여행을 하였고 이것에 대한 기록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지루한 기차 여행으로 스페인 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그의 독특한 기행문은 시작한다. 침대차를 타고 체코에서 프랑스를 거쳐 스페인으로 수천 킬로를 가는 동안의 지루함과 불편함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침대차의 이층 침대로 기어오르는 사람을 그려놓은 것을 보고는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스페인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긴 하지만 스페인은 지금도 카스티야, 아라곤, 안달루시아, 카탈로니아 등의 이름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를 좋아한다. 카스티야 지방의 중심지이자 지금은 스페인의 수도가 된 마드리드를 거쳐 , 마드리드 이전에 스페인의 수도였던 톨레도를, 저 아래 남쪽의 안달루시아 지방의 세비야, 북쪽의 카탈로니아 지방의 바르셀로나, 몬트세라트까지 스페인이라는 한 나라 안에서도 지역마다 다른 특징을 잡아내는 예리한 관찰력의 바탕에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중세때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했던 무슬림은 더이상 이베리아 반도에 없지만 무슬림의 문화와 예술은 건축물 속에 아직 살아있다. 카톨릭과 무슬림이 한 건물 안에 공존하고 있는 건축물들이 스페인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그가 본 것이 어찌 눈에 보이는 건축물 뿐이랴.
집과 가족. 전 세계 모든 곳에 집과 거주지가 있지만, 유럽에는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전통적이고 시적인 방식으로 가정을 꾸민 두 지역이 있다. (85)
어디를 말 하고 있냐하면, 하나는 영국이고 다른 하나가 스페인인데, 영국의 가정이 벽난로와 안락의자, 책이 있는 곳으로 그려질 수 있다면 스페인 가정은 여성의 영역, 가족 생활, 가정의 꽃피는 중심을 격자창을 통해 엿볼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여자로 사는 것은 정말 좋으리라 장담한다. 여성은 야자수, 월계수, 도금양 향기가 가득한 화려한 가정의 안뜰에서 큰 영광과 높은 명예를 누리기 때문이다. 가정의 아름다움은 여성에 대한 특별하고 강력한 찬미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은 여성의 지배력을 나타내고 그녀의 명성을 드높이며 그녀의 왕좌를 에워싸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여성은 눈이 큰 소녀가 아니라 등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수염 난 노부인, 즉 당신의 어머니를 뜻한다. 바로 그분의 존귀함을 기리기 위해 이 글을 쓴다. (86)
투우, 플라멩고 등을 자세히 기록한 것은 투우나 플라멩고 속에서 스페인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읽어내고자 하는 차페크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는 관광객으로서 여행 안내기를 쓰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다른 국가와 다른 문화 속에 들어가서 그것을 느껴보고 싶었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스페인의 국가주의는 대륙을 넘어 남아메리카의 국가들에서 확인될 수 있는데, 카렐 차페크는 이것을 북아메리카 지도 아래 남아메리카 자리에 스페인을 이어 붙이는 그림으로 나타내었다. 대륙을 넘어 남아메리카 많은 국가들이 지금도 스페인어를 쓰고 있는 것을 재치있게 표현한 것이다.
'여러분, 저 바다 건너에 수백만, 수천만 명이 있는데 그들은 마드리드 학술사전에 있는 언어로 말합니다.'
만약 마드리드 학술원 사전을 따르는 사람이 모두 한데 모인다면 어떨까? 곧바로 국제연맹조차 이루지 못한 일을 만들어낼 것이다.(178)
스페인은 지금까지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 불리고 있으면서 고유한 생활 방식을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면서, 기사에서 당나귀까지 이 나라는 국제적 문명의 겉치레보다 옛 스페인 풍속을 선호한다고 했다.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카디스 사람은 카디스 출신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고 마드리드 사람은 마드리드 출신이라는 사실을 긍지로 여기게 한다고.
스페인의 깊은 비밀 중 하나는 지역색이다. 이는 유럽 다른 지역에서는 사라져가는 독특한 미덕이다. (181)
스페인을 여행하며 나중까지 잊지 못할 풍경이 여럿 있지만 그중 하나가 몬트세라트일 것이다. 말로 표현하는 것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차페크는 간단하면서 특징을 제대로 살린 그림을 그려놓았다. 케이블카를 타고 그 산의 정상까지 올라가는 것을 밧줄로 교회 첨탑 꼭대기까지 정어리 통조림을 끌어올리는 느낌이라고 했다.
이렇게 경이로운 곳을 나는 난생 처음 봤다. (210)
기도하듯 모아서 들어 올린 손가락처럼 보인다는 그의 표현이 꼭 맞다. 그 손가락이 열개가 아니라 천개의 손가락이라는 것. 후에 가우디에게 영감을 준 자연이다.
그의 에필로그.
친애하는 독자여, 익숙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보거나 다루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사물과 사람 간의 다양성은 우리 삶의 지평을 넓혀준다. 당신은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익숙한 것과 다른 것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당신이 만난 다른 순례자들 역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하고 그림 같은 풍경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발이 닳도록 기꺼이 걸었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삶의 충만함과 풍요로움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217)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기꺼이 노출시켜가며 여행을 하는 이유는 결국 내 삶을 충만하고 풍요롭게 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다른 지역의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다른 모습 자체를 좋아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더 즐겁지 않냐고 한다. 우리를 구분 짓는 모든 것으로 우리를 하나되게 만들어보자고. 이런 맺음말은 영국 기행문에서는 없던 것이다.
그가 마흔 여덟살의 나이로 생를 마감하지 않았더라면 꿈꾸었던 미국과 남미로의 여행기도 남길 수 있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