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멘타 하인학교 (양장)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없다. 우리들, 벤야멘타 학원의 생도들에게 배움 따위는 어차피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 (7)

이 책의 시작이다. 책의 결론도 이 시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산책자'라는 에세이로 많이 알려진 로베르트 발저는 에세이뿐 아니라 소설도 남겼는데 <벤야멘타 하인학교>라는 이 장편소설도 그중 하나이다. 그가 출간한 세번째 소설이자 가장 많이 알려진 대표작이기도 하다. 독일어 원제는 '야콥 폰 군텐 이야기 (Jakob von Gunten)'. 여기서 야콥 폰 군텐은 이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 이름이다. 

야콥의 목표는 하인이 되는 것이었고 그래서 하인을 양성하는 학교인 벤야멘타에 입학한다. 이 학교에서 배우는 유일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이런 학교가 있을까? 벤야멘타 원장과 그의 여동생인 리자 벤야멘타양이 교사로 있는 이 학교에서 생도들이 하는 일은 이 학교의 규정들을 달달 외우거나 학교의 지향하는 목표등이 적혀 있는 책을 보는 일이다. 

어떤 생도는 따로 혼자 프랑스어 따위를 공부하기도 하고 작은 일탈 행위를 하는 생도도 있는 등, 집단내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소소한 일과 인간 관계에서 오는 갈등은 여기에도 존재한다. 

이 학교에서는 생각한다는 일 조차 쓸데 없는 일이다.

순응하는 것, 그건 생각하는 일보다 훨씬, 훨씬 더 고상한 일이다. 생각을 하면 저항하게 된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은 항상 꼴사납게 일을 망쳐버린다. 철학자들, 그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망쳐놓았는지를 알기나 할까.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무언가를 행한다. 그게 훨씬 더 필요한 일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머리들이 쓸데없이 일하고 있다. 학술적으로 다루고 이해하고 지식을 갖게 되면서 인류는 삶에 대한 용기를 서서히 잃어버리고 있다. (101)

이것에 대해 누군가는 동의를 하고 누군가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나는 이 문장을 비유적 표현으로, 과장된 표현으로 받아들였겠지만 지금의 나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만큼 살았나보다. 그렇게 살았나보다.

이 소설에서 하이라이트는,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다른 생도들을 보며 나도 일하러 나가고 싶다고 하는 야콥에게 벤야멘타 원장이 야콥을 말리느라 쏟아붓는 긴 대사중 에 나오는 다음 부분이 아닐까 한다.

내가 이제 막 너라는 놈을 얻게 되자마자 내게서 멀리 달아나버리고 싶다는 말이냐?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 학원에서 네가 할 수 있는 한 맘껏 지루해보거라. 오, 이 어린 세계의 정복자여, 세상에서, 세상 밖에서 비로소, 일을 하거나 무언가를 위해 노력할 때 무엇인가를 쟁취할 때, 그때, 그때 지루함의 바다가, 적막과 고독의 바다가 네게 그 깊은 심연을 드러낼 거다. 이곳에 그냥 머물러라. 조금만 더 동경하는 거야. 동경 속에, 그러니까 기다림 속에 어떤 축복이, 어떤 위대함이 있는지 너는 믿을 수가 없을 거다. 그러니 기다려라. (145)

야콥에게 호의를 베풀고 걱정해주던 벤야멘타 양 마저 세상을 떠나고 대부분의 다른 생도들도 학교를 떠난 후 결국 야콥은 혼자가 될 원장과 함께 길을 떠나기로 한다.

삶이 원하는 것은 격동적인 움직임이라는 것, 성찰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느낀다.

생각하는 삶일랑 이제 집어치운다. (184)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거의 모순에 가까운 말을 남긴다.

이제부터 나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신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 신은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신에 대한 생각을 한단 말인가? 신은 생각하지 않는 자와 함께 간다. (184)


야콥이 마지막으로 짐을 꾸려 떠나는 그곳은 어떤 곳일까? 책 속에는 황야 또는 사막으로 그려져 있지만 그것이 나타내는 곳은 어떤 곳일까 생각하며 이 책을 구상했을 작가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마치 노자의 무위 사상을 연상하게 하는, 그런 생각을 소설로 쓰기로 한 로베르트 발저의 마음 상태를. 

알다시피 로베르트 발저는 일생동안 세상에 알려지기를 극도로 꺼려하며 살아간 사람이지만 그가 발표한 작품들은 카프카, 헤세, 벤야민 등의 쟁쟁한 인사들에게 높이 평가되었다. 아직 이들도 아웃사이더에 속하는 시대였긴 하지만 대중적 인지도 이전에 그를 인정한 이런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로베르트 발저가 너무 오래동안 요양원과 정신 병원에서 세월을 보내며 단절된 채 살았다는 것은 지금도 안타까운 일이다.


벤야멘타 하인학교는 로베르트 발저의 일생을 나타낸 것 같기도 하고, 우리 모두 살아가는 동안 한번씩 거쳐가는 시공간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생을 마치는 반면, 어느 누군가는 벤야멘타 학교를 떠나 새로운 곳을 향해 갈 것이다. 그곳이 거친 황야나 사막일 지라도. 지루함과 적막과 고독을 불사하고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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