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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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룰루 밀러가 일곱살 무렵 일이다. 가족과 함께 간 여름 휴가지에서 아버지와 습지에 나가 아버지가 하는 일을 지켜보던 룰루 밀러는 저런 일은 대체 뭐하러 할까 생각하며 아버지에게 묻는다.

"인생의 의미가 뭐예요?"

어린 딸의 갑작스런 질문에 아버지는 잠시 아무 말 않고 있다가 씩 웃으며 말한다.

"의미는 없어!"

이어서 아버지는 말한다. 의미는 없고 신적인 존재도 없고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다, 인간 자신이 의미가 없다는 감정이 무시무시해서 그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 뿐이다, 혼돈만이 우리를 지배할 뿐이다 라고. 광대한 우주에 비하면 한 사람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고 사람이 개미보다 더 의미있는 것도 아니며 넌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너 좋은대로 살라고 까지. 일곱살 딸에게 생화학자 아버지는 한치의 거짓이나 포장없이 당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구대로 대답해주었고 딸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아버지의 그 말을 기억하고 되돌이켜 생각해보곤 했다.

저자가 20대 초반 과학 기자로 막 발돋움 하던 시기에 데이비드 스타 조던 (David Starr Jordan, 1851~1931) 이라는 어류학자를 알게 되었고 어릴 때 아버지가 말했던 그 혼돈에 반격하는 이야기를 이 사람이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초대 스탠포드 대학 총장을 지내기도 한 데이비드는 인간적으로 여러 번의 좌절과 실패를 아무렇지도 않게 극복하고 꿋꿋하게 다시 질서를 되찾아가는데 노력하며 평생을 보냈다는 것, 그리고 혼돈이 아니라 질서, 계획된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그 질서가 자연에는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다.

룰루 밀러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그가 남긴 책들과 자료를 찾아 읽고 그가 연구하던 장소들을 방문해보며 조사를 해오던 중, 룰루 밀러가 그동안 오래 사귀어오던 애인으로부터 절교를 당하는 일을 당했고 한동안 개인적으로 깊은 슬럼트에 빠지게 된다. 그 좌절과 무기력에서 헤쳐 나오기 위한 방법으로서, 그것을 오히려 동기 삼아 망해버린 사명을 몇번씩이나 극복하고 자기 길을 나아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전기 속에서 돌파구를 찾아보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과학을 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소신은 변함이 없었고 대쪽 같았다. 비과학이라고 믿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경향을 단호히 배척하고 공격하였다. 그는 "진실이 아니라는 걸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굳이 믿으려고 하는 것"은 사회 몰락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죽을 때까지 자기 신념대로만 일생을 산 사람이었다.

룰룰 밀러가 알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모든 게 사라지고 부서지고 희망이라곤 없는 최악의 날에 조차 어떻게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밖으로 나가게 한 것일까? (126)

인간과 자연의 힘을 믿어, 약을 먹는 것도 반대했다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약은 신경계가 거짓말을 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로 자연의 질서와 힘이 절대적이라고 믿었다.

동식물의 정확한 분류를 위해 수집을 하고 비교를 하고 표본을 만들어 보존하는 것이 분류의 가장 기본적인 연구 방법이던 시대에 데이비드는 그 원칙에 입각한 어류 분류의 대가였다. 진화학이 등장하고 수리분류학, 분기학과 같은 선진적이고 어떻게 보면 파격적이기 까지 한 분류 방법이 도입되어 생물의 분류 방법에 큰 전환이 이루어지고, 그때까지 알려져 온 분류 방식에 혁명과 같은 공격이 될 수도 있는 학자들의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데이비드는 믿으려하지 않았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위와 아래가 있고 열등한것과 진보된 것이 있는 사다리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질서이고 이 질서를 밝혀내는 것이 분류학이 할 일이라는 것. 나아가 사회적으로 우생학을 옹호하고 그에 따른 잘못된 처치 (열등하다고 믿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도태되어야 한다는)에도 반대하지 않았다.

룰루 밀러는 의문을 갖는다.

데이비드는 왜 그걸 보지 못한 걸까? 사다리에 대한 그의 믿음을 반증하는 증거들이 이렇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식물과 동물이 배열되는 방식에 관한 이 자의적인 믿음을 왜 그토록 보호하려 한 걸까? 그 믿음에 도전이 제기되면 왜 더욱 강하게 그 믿음을 고수하고 폭력적인 조치를 합리화하는 데 그 믿음을 사용했을까? (206)

데이비드에겐 그 믿음이 진실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그것은 바로 혼돈이었을 것이라고.

데이비드에게 그것은 지독히도 방향 감각을 앗아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혼돈이었을 것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써왔던 바로 그 세계관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개미들과 별들과 함께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느낌. 소용돌이치는 혼돈의 내부에서 바라본, 차마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시고 가차 없고 뚜렷한 진실. 너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진실을 흘낏 엿본 바로 그 느낌일 것이다. (207)

자기가 믿는 것을 뒤집기란, 쌓이는 과학적 증거 앞에서도 어려울만큼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과학을 거부하고자 했다.

책의 후반부로 가면 실화임에도 소설 속의 반전 못지 않은 충격이 드러난다. 그것을 알게 된 룰루 밀러 만큼이나 읽는 나도 충격적이었다. 이 책은 이런 내용이고 이렇게 결말이 지어지겠지 하고 읽어가던 생각이 뒤집어졌다.

<자연에 이름 붙이기>에서 저자 캐럴이 어류라는 이름은 최근의 분기학적 연구 결과로 볼때 잘못된 계통분류에 의해 잘못 붙여진 이름이라는 걸 인정해야할 시점의 충격만큼은 아닐지 모르지만, 룰루 밀러가 어류분류학의 거장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과학자에 대해 알게 되고 마지막에 이른 곳은 막다른 골목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인생과 학문적 업적에서 답을 찾으려던 룰루 밀러는 이제 더 큰 문제를 안게 되었다.

우생학의 잘못된 믿음의 사회적 국가적 조치의 희생으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아 눈에 띄지 않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인터뷰하며 물어본다.

"어떻게 계속 살아가시는 거예요?"

다시 의미를 묻는 질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일곱살때 아버지에게 물었듯이.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내가 평생에 걸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물어왔던 질문이다. 그것은 내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인생에 관해 조사하며 여러 해를 보낸 이유였으며,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던졌던 바로 그 질문이며...(223)

그리고 그들의 단순하고 천진한 대답으로부터 발견한다. 아무 의미도 없는 것들끼리의 관계 맺음, 그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상들을.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이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대단치 않은 것일지 모르는 그 그물망이 그들에겐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음을.

<자연에 이름붙이기>에서 캐럴이 움벨트의 의미를 다시 붙잡고 싶어하던 이유와 상통한다고 본다. 과학은 과학으로서 진실이지만 또한편 과학 너머의 세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 가치를 외면하지 않는 것. 독선적이지 않는 것. 다른 세계에 대한 포용력. 다른 관점에 대한 인정.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유일하고 불변의 진실이라고 보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 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놓치는 일이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227)

우리가 어떤 생물의 이름을 붙여줄때 그 생물은 인간과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이렇게 형성된 관계는 인간의 의식속에 오랫동안 자리잡아 선입견이 되고 편견이 될 수도 있다. 직관이 가려버린 사실들을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류라고 부를때, 비늘이라는 외피를 먼저 떠올리지만 폐어 같은 것은 폐와 유사한 기관을 갖고 있어 호흡을 하여 이 폐어와 연어 사이의 관계보다 폐어와 인간 사이가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폐어 같은 것은 다른 아가미호흡하는 어류와 같이 분류되면 안되는 것이다. 또한 어떤 특징들은 진화적으로, 분류학적으로, 다른 특징들보다 더 유용하고 그것이 분류에 반영되어야 한다.

인간은 은연중에 데이비드가 말한 우열의 사다리를 자키기 위해, 인간을 사다리의 정상 자리에 유지하기 위해 우리와 다른 동물들 사이의 유사성을 실제보다 과소평가하고 있다. 어류라는 말은 어류 속의 복잡성을 감추기 위해, 계속 속 편히 살기 위해, 우리가 실제보다 그들과 훨씬 더 멀다고 느끼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다. (251)


이 책은 전기인가, 과학 전문 에세이인가, 일반 에세이인가.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고 볼수 있고 하나의 주제에서 이렇게 포괄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저자의 끈기있는 연구와 조사, 열린 마음의 자세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단한 책,

올해가 며칠 안남았지만 얼마전에 읽은 <자연에 이름붙이기>와 더불어 이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올해 내가 읽은 최고의 책으로 꼽고 싶다.



책 관련 동영상을 찾아보다가 아래 자료를 찾았다. 저자인 룰루 밀러와 일곱살 그녀에게 모든 것은 의미없다고 말한 생화학자 아버지가 함께 참여한 웨비나이다.


https://youtu.be/ixe1--0yG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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