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산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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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의 작가 필립 로스의 <아버지의 유산>은 소설이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소재는 다르지 않다. 

그는 또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구나. 이번엔 그의 아버지가 죽기까지의 과정을 쓴, 소설이 아닌 실제 이야기이다. 

묵직하고 절제된 묘사 방식으로 인해 소설 <에브리맨>을 소설이 아닌 느낌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소설이 아닌 이 책도 소설과 톤이 크게 다르지 않아 이번엔 마치 소설을 읽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원제는 patrimony. 


부모의 죽음, 부모가 죽어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치하지 못할 특별한 경험이고, 이후 삶에 영향을 미친다. 한때 그의 몸을 빌어 세상에 나왔고 그의 손에 의해 길러졌으며 그의 말과 행동이 나의 세상을 열어나가는 안내서 역할을 해왔던 그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참담하고 허무하다.

'유산'이란, 물질적인 것을 뜻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유산의 일부일 뿐, 그보다 더 결정적이고 중요한, 피할 수 없는 정신적인 것들까지 포함한다는 것을 나 자신도 경험해보고 알았다. 필립 로스도 아버지의 유산이라는 말을 그런 의미로 썼을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어떤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인 것을 봐도.

그는 이 책에서 아버지의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아버지가 자라온 이야기를 하고, 그가 어떤 남편이고 아버지였는지 이야기한다. 그가 얼마나 고집스럽고 원리원칙주의자였는지. 어머니에겐 다정한 남편이라기 보다 불친절한 독불장군 같았으며 그의 강박적 고집스러움은 어머니를 말년에 신경쇠약으로 몰아갈 뻔 하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허투로 돈을 소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집안의 청결은 더 이상 강조될 수 없을 정도였다. 한편 아버지는 말단 보험회사 직원으로 출발하였지만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근면 성실과 철두철미한 직업 정신은 그를 지점책임자의 위치에 올려놓기 까지 했다. 그런 경력은 아버지로 하여금 평생 완벽한 모범가장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게 했다. 

그렇게 철옹성 같던 아버지가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뜨고 혼자가 되자, 어떤 공동시설에도 가는 것을 거부하고 잘 먹지도 않으며 하루 종일 울고 있는 날이 늘었다. 필립 로스와 그의 형은 자주 아버지를 방문하고 안부를 살피며 아버지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주지만 말을 잘 듣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오른쪽 눈의 시력 이상, 안면신경마비, 청력 이상의 증상으로 찾은 병원에서 아버지에게 내린 진단은 뇌에 대형 종양이 있다는 것이었다. 수술로 회복되리란 보장이 없어 병원에서도 크게 권하지 않는 단계였고 다른 치료법이 없는 상태라서 그래도 수술을 해봐야하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뇌에 큰 바늘을 넣어 조직을 떼어내야 하는 검사 과정조차 나이든 아버지에게는 반죽음같은 소모적인 과정이었다. 수술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선택, 어느 선까지 수술을 하느냐, 어느 지점까지 인위적 생명 연장 장치를 유지하느냐 등, 죽는 과정은 결코 조용한 이별의 과정이 아니었다. 그런 결정의 과정도, 환자 본인의 죽어가는 생리적 과정 자체도 끊임없는 '일'이었고 죽는 이는 '일꾼'이더라고 썼다. 

나는 아버지가 호흡 유지 장치를 달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해도 반드시 다가올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상황을 상기했다. 나는 그 모든 것, 모든 것을 보면서도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나는 최대한 아버지한테 가까이 몸을 기울이고 아버지의 움푹 파이고 망가진 얼굴에 내 입술을 갖다 대고 간신히 힘을 내 마침내 속삭일 수 있었다. 

"아버지, 보내드릴 수 밖에 없겠어요."

아버지는 몇 시간째 의식을 잃고 있어 내 말을 들을 수 없었지만 나는 스스로 충격을 받고 놀라고 울면서 다시 또다시 나 자신이 그 말을 믿을 때까지 아버지한테 그 말을 되풀이할 수 밖에 없었다. (278) 

아버지가 죽어가는 과정에서 필립 자신도 심장 바이패스 수술을 받는 경험을 함으로써 아버지의 입장을 더 절실하게 받아들이는 계기가 된다.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고 수술을 받았고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그때 아들의 병실에 자기가 있어줬어야 한다며 아들을 나무랜다. 


읽기는 금방 읽었는데 읽고 나서 울적한 기분은 오래 갔다.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이 그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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