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근희의 행진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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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요즘 한국의 젊은 작가의 소설을 읽는다. 2014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2020년에 처음 단행본 소설 <당신의 4분 33초>을 낸 이서수 작가는 등단 이후 출간까지 오랜 공백기간이 있은 듯이 보이지만 출간을 바로 했든 그렇ㅈ 않든 글을 써온 시간이 짧지는 않은 작가 같다는 느낌을 읽는 동안 굳혀가게 되었다. 

법학과를 졸업했지만 졸업후 그리고 등단하고난 후까지도 자차로 택배배송, 북카페, 각색 작가등의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 이런 경험은 소설 속에 주인공의 직업으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황산벌청년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젊은 작가상등을 수상했고, 장강명, 서유미, 임성순 작가등과 함께 월급사실주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이 책 <젊은 근희의 행진>은 작가의 2014년 신춘문예 등단작에서부터 2022년 발표작까지, 거의 10년이라는 기간동안 발표해온 소설 열편을 묶었다. 내 경우엔 이런 소설집을 읽을때 읽는 속도가 제일 빠르기도 하지만 이 책의 경우 열편의 소설이 가족노동이라는 일맥상통하는 주제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지루할 틈 없이 읽게 만드는 무엇이 있었다.

 

미조의 시대 

키워드: 압박면접, K-장녀, 이부망천, 구인 구직, 주택 임대

공시생 7년차에 여전히 헛꿈을 쫓아다니는 오빠 대신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미조는 엄마와 새 전세집을 알아보고 다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남긴 평생 모은 오천만원의 가치를 실감하면서 여섯번째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한다는 이중의 부담까지 안고 사는, 이것이 미조의 시대인 것일까.

인간을 육체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간이지만, 정신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대야. (37)


엉킨 소매

키워드: 임신중지, 불법점유, 세 여자

이 책에 실린 단편들 중에는 세 여자가 함께 등장하는 작품들이 눈에 띈다. 혼전임신 6주만에 남자친구와 합의하에 임신중지를 결정한 여자 옆에서 남자친구 대신 여자 친구 둘이 함께 해준다. 임신중지에 대해, 여자의 몸에 대해, 세 여자는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가지면서도 서로를 외면하지 않으며 서로의 앞날에 기꺼이 엉키고자 한다.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키워드: 프리랜서, N잡러, 코로나, 수동적공격성, 세 여자

혼자 사는 여성이 독립하는 과정엔 발 없는 새로 살아야 하는 시기가 있다. 집이 없다는 것, 어디에도  내려앉아 쉴 곳 없다는 것은 계속 공중에 날고 있어야 하는 시간을 의미하고 있다.


내려앉으려는 참새만 보면 계속 내쫓았어. 결국 참새는 공중을 계속 날다가 힘없이 떨어져 죽었어. 너무나 고단하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견디다가. 근데 사영아,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집이 없는 우리도 그 참새 같다는 생각. 정착하지 못하는 우리가 바로 그 참새 같다는 생각. 어디에도 내려앉아서 쉴 수가 없잖아. (120)



젊은 근희의 행진

키워드: 뮌하우젠증후군, 반지하, 삼모녀, 유튜버, 관종, 유교걸, 인스타사기피해    

20대 근희, 30대 문희 자매의 이야기이다. 30대 언니 세대가 동생 근희 세대를 보는 관점, 이해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겨우 받아들이기는 하나 이해한 것 같지는 않다. 20대와 30대 사이에도 이렇게 다른 가치관과 행동 방식의 벽이 존재한다는 것이, 소통이 넘쳐나면서도 소통에 목마른 현대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연희동의 밤

8년째 드라마작가를 꿈꾸며 각본을 쓰고 있는 언니와, 꿈은 포기하고 마지못해 회사를 다니며 경제고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동생. 언니는 가망없는 꿈을 한탄하고, 그런 언니에게 동생은 하루 빨리 포기하고 현실에 발을 딛으라며, 연희동 일대 술집들을 돌아다니며 얘기를 이어간다. 둘은 모두 꿈의 실패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저는 지금까지 진짜 인생은 여기가 아니라 다른 데 있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아니었어요, 여기가 진짜고 거기가 가짜였어요. (173)

꿈과 현실 사이가 너무 아득할때 어떡해야하는가. 꿈이 가짜같을 때.


나의 방광 나의 지구

키워드: 신혼부부, 신도시아파트, 과민성방광, 스트레스, 은행신탁상품

내집 마련을 위한 고군분투 얘기는 흔하다. 이것을 지구 얘기로 끌고 가는 것을 보며 이것이 작가이구나 새삼 감탄했다. 이것이 소설 속 내용이 아니라 피부로 느끼는 현실, 팩트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 새 커플이 되어 새로운 사회에 진입하자 마자 느끼는 벽이 너무 높고 아득하다라는 것이 씁쓸하다.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는 분하다는 듯이 숄더백을 내던지며 외쳤다. 그의 귀에는 그 말이 이렇게 들렸다.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해서 집이 없는데?

어찌된 일인지 성실히 살아온 그들에겐 집이 없었다. (204)


그녀는 집을 사랑하는 대신 지구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 지구가 그녀의 집이 될 것 같았다. 

지구를 소유할 수 있는데 왜 24평짜리 아파트를 소유하지 못해 안달해야 할까?

지구는 정말이지 끝내주게 넓고, 인간이 지은 그 어떤 건축물보다 아름답다. 소유하려고 마음먹으면 충분히 소유가 가능하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 것이 되니까. (231)


재활하고 사랑하는

키워드: 어지럼증, 전정신경염, 재활운동, 과중한 업무, 이석증, 공시오류

각자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커플의 이야기. 스트레스는 신체적 이상으로 연결되어 어지럼증을 유발하고, 병원에서는 재활운동을 권하는데 그것과 더불어 이 커플의 관계도 재활이 필요한 단계로 가고 있다.


그는 매미를 먹었다

키워드: 덮밥집, 매미소리, 비수기, 울음, 기다림

지금까지 읽은 작품들중 가장 좋은 점수를 주고 싶었던 단편이었다. 사람소리가 아니라 매미소리를 내며 우는 주인공의 심경이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도록 썼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름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매미, 그리고 나무라는 공간적 배경의 연결도 좋았다.


현서의 그림자

키워드: 숙모, 사촌동생현서, UFO, 외계인, 안락한 현실

2014년 <K의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던 단편이다. 앞의 작품들에 비해 인위적 터치가 남아있는 것 같은, 특히 마무리 부분이 아쉬웠던 작품이다.


구제, 빈티지 혹은 구원

키워드: 구제옷, 타임캡슐, 창고형빈티지

비맞은 젊음의 초상이라고 할까. 구제 혹은 빈티지, 히피 혹은 쓰레기로 보여질수 있는 그들의 삶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2014년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오랜만에 동시대 우리 작가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제대로 느꼈다.

가난의 깊은 경험과 고찰을 기반으로 가족, 고용, 노동, 젠더에 대해 한 사람의 목소리로 부르는 열 가지 다른 노래를 들었다는 느낌이다. 기대되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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