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이 보일 때까지 걷기 - 그녀의 미국 3대 트레일 종주 다이어리
크리스티네 튀르머 지음, 이지혜 옮김 / 살림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미국에는 3대 트레일 코스가 있다. 


1.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Pacific Crest Trail, PCT, 4,277킬로미터)

 



2. 콘티넨털 디바이드 트레일 (Continental Divide Trail, CDT, 4,900킬로미터)



3. 애팔래치아 트레일 (Appalachian Trail, AT, 3,508킬로미터)




이 책은 어렸을때 운동이라고는 질색하던 독일 여성 크리스티네가 걸어서 12,700킬로미터에 이르는 미국의 3대 트레일을 종주한 내용을 담고 있다. 

3대 트레일은 지도에서 보다시피 그 큰 대륙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코스들이다. 첫번째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은 남쪽의 멕시코 국경부터 북쪽의 캐나다 국경까지, 두번째 콘티넨털 디바이드 트레일은 대륙 가운데 로키 산맥을 따라 이어진 길이며, 세번째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미국 동부 애팔래치아 산맥을 따라 이어진 코스이다. 다 합하면 12,700 킬로미터. 엄청난 거리이다.


바깥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잔뜩 긴장한 탓인지 속이 울렁거려 왔다. 나는 샌디에이고에서 출발해 멕시코 국경으로 향하는 어느 픽업트럭 안에 앉아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멕시코와 캐나다 사이를 잇는 4,277킬로미터 길이의 퍼시픽 트레일, 그 중에서도 남쪽 끄트머리 지점이었다. 나는 다른 장거리 도보여행자 두 명과 함께 트럭 뒷좌석에 구겨지다시피 끼어 앉아 있었다.


이 책의 시작 페이지이다. 이렇게 긴장으로 시작한 트레일을 그녀는 2004년에 PCT를, 2007년에 CDT에 이어 AT까지 종주함으로써 미국의 3대 트레일을 완주하였다. 트레일을 시작할때 그녀의 나이 마흔 여섯이었고, 종주를 시작할 때는 유지하고 있던 직장과 집을 종주 하는 동안 다 포기하고 이루어낸 일이었다. 이로써 그녀는 세 트레일을 모두 완주한 사람에게 미국 장거리 하이킹 협회가 수여하는 트리플 크라운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멋진 책도 내지 않았는가.

이책의 원제를 보니 Laufen, Essen, Schlafen. Eine Frau, drei Trails und 12700 kilometer Wildnis이다. 영어로 옮겨보면 Run, Eat, Sleep. A Woman, 3 trails and 12700km wilderness


순탄하지 않은 여정의 시작에 필요한 것은 장비, 시간, 철저한 계획 등 한두가지가 아니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용기'이다. 뭔가를 이루어 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 둘을 구분짓게 하는 것은 그 일을 시작하는 용기라고 생각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꿈 꾸는데서 그치고 말지만 어떤 사람은 실행을 한다. 

책 내용이 트레일 종주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라고 해서 자칫 내용이 딱딱하지 않을까, 지루하지 않을까 했는데 읽어보니오히려 그 반대였다. 미국인이 아닌 독일인으로서 짧지 않은 기간동안 미국 땅을 밟으며 만나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 얘기는 흥미로왔으며, 물을 만났을때 망설임없이 옷을 다 벗고 물로 뛰어드는 자기를 이상하게 보며 눈길을 피하는 미국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하는 독일인 저자. 유럽과 미국 사이에도 문화 차이는 존재하는 것이다. 하루 먹을 식량을 무게로 측정해서 제한해야 하는 것, 트레일 중에 만나는 곰이란 어떤 의미인가, 물이 부족할 때 어떤 긴급 조치를 취하는가 등등, 상상도 못해보던 내용이 많았다.

트레일의 일부 구간을 단기간 걷는 사람들과 구별하여 종주를 목적으로 하는 하이커들을 '스루하이커' 라고 한다든지, 이 분야에서 쓰이는 용어들이 자주 나왔다. 트레일 엔젤 (스루하이커들에게 무료 쉼터를 제공해주는 사람), 카우보이 캠핑 (텐트 없이 자는 일), 바운스 박스 (짐 무게를 줄이기 위해 당장 필요하지 않은 짐 일부를 미리 목적지 우체국에 보내놓고 나중에 찾는 것), 하이커의 자정은 밤 12시가 아니라 밤 9시라는 것 등, 이런 용어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 하는 것으로 진짜 스루하이커인지 아닌지 알아볼수 있다고 한다. 

스루하이커들 중 대다수는 서른 살 이하의 남자들, 그 다음 많은 연령층이 50대 이상이라고 한다. 처음 트레일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남자보다 여자들이 성공할 확률이 높은데, 이들은 첫 시작인만큼 준비를 철저히 해오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허세가 적기 때문이라고 한다.

트레일러들이 묵고 가기도 하는 시설로 산장이 있는데 젊은 층이 많이 사용하는 산장들은 술판을 벌이고 마약을 하는 장소인 경우가 많더라는 사실은 씁쓸했다. 젊은 도보여행자들의 여행 목적 자체가 사교적 측면에 중점을 두는 경우가 많아서 만나도 감정적으로 공유할게 딱히 없더란다. 

저자는 미국 3대 트레일 종주 이후로도 아웃백이라 불리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황무지, 서유럽, 남유럽 전체를 도보로 여행했고, 가끔 자전거 여행을 끼워넣기도 했는데 이 중에는 일본과 한국도 포함되었다. 

8년 동안 스물 다섯 켤레의 신발을 교체했고, 0.5톤의 초코릿을 먹었으며 2,000일 이상의 밤을 텐트에서 보냈다고 한다. 1년이 365일인데 2,000일을 텐트에서라니.

이런 사서 고생길을 걸으며 배우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초코바 하나의 의미가 달려졌다는 것뿐이니까.

하루에 먹는 초코바의 갯수까지 정해가지고 걷는 트레일이라, 예상치 못한 일로 일정이 계획보다 길어지면 당장 먹을게 떨어지게 된다. 굶주리며 겨우 겨우 목적지까지 걸어가고 있던 중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자기네에게 남은 거라며 먹겠냐고 내미는 초코바에 대한 저자의 반응이 나오는 대목이다.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초코바라고? 

이 뜻밖의 행운을 믿을 수 없어 나는 목까지 메었다. 

몇분 동안 멍하니 서서 손에 든 초코바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벅찬 행복감이 밀려왔다. (161)


초코바 하나가 이렇게 감격할 일인가. 아무때나 심심풀이로 먹던 밀키웨이 초코바가 말이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육체적 행복감을 느껴본 것이 언제였던가. 

나는 지난 수년간 경험했던 성공의 순간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봤다. 일을 그만두기 전 마지막으로 급여가 인상되었을 때는 어땠었지? 그때도 만족감은 느꼈지만 이 단순한 초코바가 유발시킨 원시적이고 육체적인 행복감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내 주위의 거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돈을 가치와 행복의 척도로 여겼다. 그리고 가진 돈이 많아질수록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 보다 값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것을 찾게 되었다. 내 행복의 기준은 그렇게 점점 높아져만 갔다.

PCT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는 내게 그와는 정반대의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트레일에서의 삶은 행복의 기준을 상향시키기는 커녕 어마어마하게 끌어내렸다. (162)


행복해지는 방법 중 하나는 그 기준을 끌어내리는 것.

이 단순한 진리를 배우기 위해 12,700킬로미터를 걷는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깨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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