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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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평화보다는 전쟁에 가깝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더 무서운 전쟁. 

언제 어떻게 시작될지 모르고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른다. 마치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처럼.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 때문 아닌가?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기 때문. 

모든 사랑이 죽음처럼 확실한 끝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스러진다고 생각한다. 물리적인 끝만 끝이  아니라 기억속에서 점차 사라지는 끝도 있는 것이니까.

1940년 생인 아니 에르노가 1991년에 출간된 소설이니 그녀의 나이 51세였다. 데뷔 소설인 <빈 옷장>부터 자전적 소설로 시작해서 체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겠다는 노선을 분명히 한 작가이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1)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그대로 느껴질 것이다. 세상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험. 

내가 놀란 것은 51세의 나이에도 사랑의 감정 노선은 여전히 이렇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2, 30대와 다를게 없다. 

파리에 살고 있는 중년의 여자 '나'는 러시아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나와 있는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다.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나의 일상보다 더 중요해지고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의 전화 기다리기, 그와 만나기, 다시 그의 전화 기다리기의 순환 고리 속에 사는 날들. 그 고리가 끝나는 날 자기의 삶도 끝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움을 안고 사는 날들. 이미 부인이 있는 남자이지만 나 말고 또다른 연인이 있다면 차라리 그것이 한명의 여자가 아니라 여러명의 여자였으면 하고 바라는 심리.

이런 열정은 단순히 감정의 일시적 폭발이 아니라 한권의 책을 써내는 열정과 같다고 했다.

가끔, 이러한 열정을 누리는 일은 한 권의 책을 써내는 것과 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완성해햐 하는 필요성, 세세한 것까지 정성을 다한다는 점이 그랬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서 글을 완성한 후에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이 열정이 끝까지 다하고 나면 죽게 되더라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19)


가끔씩 엄마를 방문하는 아들들에게도 그 사람에 대해 말해두고 아들은 집에 와도 되는지 오기 전에 알아서 미리 전화를 걸어주는 문화. 최소한의 것을 알려주지만 그렇다고 아들에게 모든 것을 공개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유는,

아이들에게 판단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22)


그를 만나는 동안에는 클래식 음악을 한번도 듣지 않고 대중가요가 더 마음에 들어오고, 여성잡지를 펼치면 제일 먼저 운세란을 읽고, 그의 전화가 오기를 빌면서 지하철 역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거지들에게 적선을 하고, 만약 몇월 몇일에 그에게 전화가 오면 자선단체에 기부를 하겠다는 마음을 먹어보기도 하고, 일상의 짜증스럽고 귀찮은 일들에도 무덤덤해진다. 

한 사람에 대한 집중된 열정이 온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삶이지만 작가는 그 열정의 대상에 대해 쓰기보다는 그런 자기의 심경에 대해, 자기의 일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더 쓰고 있다는 점에서 나로 하여금 이 책을 더 특별하게 여기게 했다. 

책 마지막에 이와 관련된 문장이 나온다.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 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그 사람이 내게 준 무엇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66)


이 짧은 소설의 마지막 문장 만큼 마음에 큰 도장을 찍는 말이 있을까 싶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이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67)

이 세상 사람들을 이 말을 이해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가의 책을 한권 읽고 거기서 그치지 못하게 하는 것, 그의 다른 책을 꼭 찾아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면 적어도 내겐 성공적인 읽기라고 본다. 

알려져있는 대로 아니 에르노는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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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0-31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는 제게 재미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멀리했는데....
욘 포세를 읽고는 아니 에르노 작품이 양반이란 걸 알았습니다. ^^;;

hnine 2023-11-01 11:28   좋아요 0 | URL
그럴 것 같아서 저는 아직 욘 포세 책 읽을 생각을 안하고 있습니다 ^^
아니 에르노 책 여자들에게 더 와닿을 내용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