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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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얼마나 아름답고 평범하고 시시한 삶인가! 어느 곳에도 모험이나 투쟁 같은 것은 없으며 예외적이거나 비극적인 면도 없었다. 제대로 작동하는 기계를 바라보는 것같이 흐뭇한 눈길로 되돌아볼 수 있다. 나의 삶은 소리도 내지 않고 멈출 것이다.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조용하고 묵묵히 움직임을 끝낼 것이다. 또한 그래야 한다." (19쪽)


나도 당신도 언젠가는 지나온 생을 되돌아 보고 정리하고 싶어질 때가 올것이다. 그때 나의 삶은 어떤 삶이었다고 말하고 싶을까. 이 소설의 '나'는 말한다. 나의 삶에서는 비일상적이고 극적인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그저 기계적인 세월의 흐름이었고, 평범한 삶이었다고.


며칠 전 '나'는 정원에서 잡초를 뽑는 일을 하던 중, 엄청나게 강하고 확실한 '죽음의 느낌'을 감지한다. 놀람과 두려움에 이어, 나의 주변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집안의 모든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이젠 아무것도 정돈할 게 남아 있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음에도 그는 아직 정돈해야할 뭔가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것은 바로 나의 삶을 정리하는 일, 나의 삶을 짧고 간결하게 기록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자기는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기록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자문해본다. 그가 읽어온 책들에서 보면 얼마나 신기한 모험과 별난 인물들이 나오던가. 그에 비해 자기가 살아온 삶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삶이란 특이하고 별난 모험이 아닌 일상적 법칙의 흐름 아니던가, 오히려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찬미해야 옳지 않을까, 덜컥거리고 비통하고 산산이 부서지지 않았다는게 부족한 삶을 살았다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은 그렇게 쓰여진, 한 노인의 마지막 정리의 결과물이다.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시작한다. 아버지는 작은 목공소를 하며 돈을 모아가는 것을 인생 목표로 성실하게 일하는 가장이었고 엄마는 감성적이고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소심하지만 책을 좋아하고 생각이 많은 아이로 자란 그는 아버지의 기대에 맞춰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었고 대학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하지만 중간에 그만두고 좋아하는 시를 쓰며 시인을 꿈꾼다. 하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자기의 시가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자 시인이 되고 싶은 꿈을 접고 대신 경제적으로 당당하게 독립하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의도로 철도역 공무원으로 취직을 한다. 아들에게 기대를 많이했던 아버지의 엄청난 반대가 따른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뜻을 굽히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기보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지는 편이었던 그는 도시에서 역무원으로 기계적인 생활을 하던 시기를 이렇게 회상한다.

내 인생의 이 기간은 일종이 끝없는 독백의 시기였다. 독백이란 지독한 것이며, 어느 정도는 자기 파멸이자 우리와 삶을 결속시키는 사슬을 부서뜨리는 일이다. 독백하는 사람은 고독할 뿐만 아니라 끝장난 사람이다. (75)

역을 드나드는 다양한 군상들을 보며 자기와는 동떨어진 세상을 바라보는 입장이었던 것 같다. 별종의 군상들이 몰려드는 역은 모든 종류의 악이 번성하는 데 비옥한 토양 구실을 하는 것이며, 자신은 그 희미한 몰락의 냄새를 즐겨 맡는다고 해놓았다. 역에서의 하루를 두 페이지에 걸쳐 묘사해놓은 부분 (79, 80쪽)은 그의 문장력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별을 쳐다보면서 나는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경험했는지 아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처럼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이곳은 실로 세상 끝에 있는 마지막 역이었다. 선로는 풀과 냉이 속으로 뻗어 있었고, 그 뒤에는, 바로 적치장 뒤에는 벌써 우주가 나타났다. 강과 숲이 소리를 냈고, 그 뒤에는 우주가 소리를 냈다. 별들은 오리나무 잎새처럼 깜박이며 소리를 냈고, 산바람이 세상 사이를 가르며 불었다. 아, 그곳은 폐를 채우기에 좋은 곳이었다! (80)


강의 물결처럼 늘 똑같고 늘 새로운 생활. 늘 똑같고 늘 새로운 반복.

가끔 나는 놀랐다. 이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그렇다. 이것이 인생이다.하루에 기차 두 대가 오가고 끊긴 선로에는 풀이 덮이고, 그 바로 뒤에는 병풍 같은 우주가 나타나는 것이. (82)

'이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우리도 가끔 이 생각을 할 때가 있지 않은가? 이렇게 적절한 어휘, 매력적인 문장으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지.

결혼을 하고, 성실한 임무 수행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한 끝에 역장으로 승진도 한다. 자기의 직장인 기차역을 완벽하게 돌아가는 기계처럼 유지시키면서 이 역만은 정말로 나의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남자에게는 자신의 일을 몰두할 수 있는 곳이 가정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116)

그에게 정말 가정은 집보다 오히려 일터였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부에게 아이는 생기지 않았고 그런 현실에 적응하며 남편에게 모든 것을 맞추어 살기로 하는 아내 덕에 표면적 평화와 안정에서 벗어나지 않는 집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시간은 흘러간다. 

결국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시간이다. (117)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굴절율이 다른 여러개의 색으로 분산되어 나온다. 작품의 중반을 넘어서 '나'는 평범한 인생이라는 것의 정체가 뭘까 생각하다가 '나'라는 한 사람 내면에 서로 다른 '나'가 존재함을 알게 되고, 그들의 대화가 시작된다. 그것은 자아 비판일수도 있고 자기에 대한 철저한 이해의 과정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의 진가는 여기서 드러나는 것 같다. 여러 개의 다른 내가 삶의 각 순간에 밀고 당기고, 숨거나 드러나며 지금까지 이끌어 왔음을, 통합된 개체로서 '나'는 뒤늦게 발견하는 과정이다. 어린 시절 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기 보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졌는지, 들키면 처벌받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역장으로서 친구에게 비밀리에 정보를 넘겨준 것은 무엇때문이었는지, 시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기차역 사무원이 되기로 한 것은 어떤 '나'의 결정이었는지, 하나 하나 해부하는 과정이다. 프리즘에 빛을 통과시켜 서로 다른 여러 색의 존재를 비로소 발견하듯이. 면적을 미분하여 여러 개의 선이 모여 이루어졌음을 확인해가듯이. 


삶에서 규칙적인 생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너의 내면에는 뭔가 두려운 게 있었고, 너는 쉬지 않고 달아났어. 어디에서 멈춰 섰었나? 세상 끝에 있는 마지막 역이었던가? 아니야, 그곳엔 아직도 약간의 인광이 빛을 발하고 있었어. 네게 부여된 역에 가서야 비로소 멈출 수 있었고 넌 사물들이 안전하게 질서를 이루는 그곳에 자신을 숨겼지. 그곳에서는 더 이상 두려워할 게 없었고 안정을 찾을 수있었어. 넌 죽도록 무서워했지. 이게 죽음일지 모른다. 조심해야 해. 이 길로 몇 걸음만 더 가면 미쳐 버리고, 자신이 파멸해 죽게 될 거라고 느꼈겠지. 

그러고는 너를 파멸시키지 않을 그 점잖고 견고하고 규칙적인 생활에 단단히 매달렸지. 삶에 필요한 것만을 골라잡고는 다른 어떤 것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어. 

자신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너는 일들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그 일을 네 직업이자 생활로 만들었다. 너는 성공했고, 너 자신에게서 벗어나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 양심적이고 만족스럽게 평범한 인생을 살았어. 잘 살아온 삶인데 또 뭘 원하는 거지? 뭘 유감스러워하는 건가? (173, 174, 175)

이 부분을 이 작품의 핵심 구절로 꼽고 싶다. 

서로 완전히 다른, 극단적으로 다른 존재인 여럿의 '나'가 나의 내면에 서로 뒤섞이고, 삶의 각 순간마다 두각을 나타내어 하나의 인생을 이루어온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alter ego의 존재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문학 작품 속에서 이렇게 피부에 와닿게 느껴보긴 처음이다. 


카프카, 쿤데라와 함께 체코 국민 작가중 한 사람이라는 카렐 차페크.

책 표지 그림이 재미있다. 누구의 그림인가 봤더니 요세프 차페크. 카렐 차페크의 친형이다.





이건 갈등의 여지 없이 별 다섯개.

생각이 많아지게 만드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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