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악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1
레이몽 라디게 지음, 원윤수 옮김 / 민음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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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몽 라디게. 처음 듣는 이름이다.

1903년 프랑스 출생. 

아버지는 화가였고 7남매중 장남. 어려서부터 영특했는지 장학생으로 학교에 입학하지만 학교가 별로 재미없었는지 겨우 열두살 되었을때 학교를 그만 두고 집에서 책읽기에 집중했다. 

많이 읽으면 쓰고 싶어지는 법. 1918년 열다섯살에 짧은 글을 써서 잡지나 신문에 게재하기 시작한다. 이때 각별한 친분을 쌓게 되는 사람으로 장 콕도가 있는데 이 둘은 '르 코크'라는 작은 잡지를 창간하기도 하면서 점차 우정와 애정 사이의 각별한 관계가 된다. 

열일곱살때 <육체의 악마> 를 집필 완료하고 스무살때 책으로 출간한다. 워낙 어린 나이 작가의 출판이고 보니 출간 후 출판사의 대대적인 홍보가 있기도 했고 다른 작가들의 찬사와 비평계의 비웃음을 함께 받기도 했다. 소설도 일찍 내었지만 그의 생애도 일찍 마감했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장티푸스로 겨우 스무살의 나이에 사망하였으니까. 

열 몇살때 벌써 동시대 작가, 시인, 화가들과 어울리며 모임을 가졌으니 범재의 수준은 아닌 것이 확실하지만 그 나이에 다섯 명의 정부를 두고 연애 행각을 벌인 이력도 가지고 있다.



민음사에서 나온 책 표지는 헝가리 화가 벤추르 줄러의 <나르키소스> 일부.






원화 전체는 아래와 같다.





작가의 생애가 짧았던 만큼 남긴 작품이 많을리도 없고 (한 두 작품 정도 더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겨우 열일곱에 쓴 소설이 이렇게 나중에 세계문학전집으로 발간되어 읽힐 만큼 대단한 무엇이 과연 있는 것일까?  관심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제목이 주는 느낌과 작가의 이력을 보건대 소설 내용 역시 작가 자신의 일찍 시작한 연애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연애 소설, 사랑 소설이 아닐까? 그 짐작의 수준을 과연 넘어설까. 그래야 하는거 아닌가? 하는 호기심.

 

작가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주인공 '나'는 학교에 별로 흥미를 못 붙이고 일탈 행위를 일삼으며 다른 곳에서 재미를 찾으려 한다. 


열두살이 될 때까지 나는 카르멘이라는 소녀에게 품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풋사랑도 해 보지 못했다. (8쪽)


열두살에 이미 맘에 드는 여자 아이를 점찍고 동생을 시켜 카르멘이라는 이 여자아이에게 사랑 고백 편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주인공. 하지만 이 편지는 카르멘 대신 학교 교장 손에 들어가는 일이 벌어져 학교에 소문이 나고 보통의 또래들과 어울리기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주인공 역시 또래들은 시시하게 여겨 이들과 골고루 어울리기 보다는 맘에 맞는 한 친구하고만 친하게 지내는 쪽을 택한다.


우리 또래들에 대해 그와 내가 품는 '공통의 경멸'은 우리를 한층 가깝게 해 주었다. 우리는 우리들만이 사물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요컨대 우리들에게만이 여자들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25쪽)


이 시기에 터진 전쟁은 '나'로 하여금 더욱 더 방종과 무위의 생활에 빠지게 하는데 이웃집에 남편이 전쟁에 참여한 젊은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 이 소설에서 본격적인 사건의 시작이다. 

유부녀 마르트와 당장의 행복을 쫓는 생활을 즐기면서도 도덕과 이기심, 행복의 정당성을 떠올리기도 하는 '나'는 논리를 따질 줄 아는 천재이면서 육체의 악마이기도 하다.


이성적인 결혼이라니! 말도 안된다. 각자 연애 결혼이 제공하는 이점들만을 상대방에게서 보고 있어 이성(理性)이 차지할 자리가 거기엔 없으니까. (44쪽)


기존의 결혼 제도의 헛점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졌으며,


무슨 상관이랴! 행복이란 이기적인 것이다. (35쪽)


행복을 인생에 추구해야할 지고의 가치로서가 아니라 행복도 사랑도 결국 이기적인 것일뿐이라는 생각을 드러내고며 비웃기도 한다.


과연 주인공 '나'는 육체적인 사랑에만 탐닉하였을까? 아니었다.


나는 자신의 비판과 가식을 스스로 꾸짖으며 마르트를 내가 전보다 더 사랑하는지 또는 덜 사랑하는지 자문해보면서 며칠을 보냈다. 내 사랑은 모든 것을 버무려서 억지를 쓰고 궤변을 부렸다.

그녀 옆에 누워 있으면 집에 가서 혼자 눕고 싶은 욕망이 항상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니, 그녀와 함께 산다는 것을 견딜수 없어지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한편 나는 마르트 없이 산다는 것 또한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간통의 형벌을 비로소 알기 시작했던 것이다. (111쪽)


끊임없이 이렇게 스스로 반문하며 탐색하고 성찰하기도 한다. 차라리 열 몇 살 불 같은 열정에 몰두한 애정 행각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불륜의 관계를 유지해나가면서도 객관화하여 분석하고 탐색하고 미래를 예측해보는 피끓는 청춘이라니. 이 소설 캐릭터의 특징이자 이 작품의 차별점이 여기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관계가 지속되어 감에 따라 여자는 점차 훨씬 연하인 주인공 '나'에게 복종적이 되어가고 그런 여자를 보며 만족스럽기 보다는 현타가 옴을 느끼는 주인공은 자책하며 이 관계가 파괴로 가고 말 것을 예감까지 한다. 


내 기분에 맞춰 마르트를 이끌어 왔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차츰차츰 나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바로 그 점에 대해 나는 자책을 했고 또한 그것이 우리들의 행복을 의식적으로 파괴했다. 그녀가 나와 닮았다는 것, 게다가 그것은 내 작품이라는 사실들이 나를 즐겁게도 해 주고 또한 화나게도 했다. (118쪽)


읽으면서 밑줄 쳐 놓았던 이 대목을 지금 리뷰 쓰면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대단한 심리 묘사이며 명쾌하고 논리적 사고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나'는 결국 마르타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된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내가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일이든 간에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고 결코 생각해 본 일이 없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최악의 것을 책임지게 되었던 것이다. (122쪽)


연인의 임신 소식을 듣고 난 '나'의 반응이다.


죽을 뻔 했던 사람은 죽음을 안다고 믿는다. 어느 날 마침내 그 죽음이 나타나면 그는 그 죽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죽음은 아닌데 ......." 하고 죽어 가면서 말하는 것이다. (181쪽)

마지막 반전까지.

내용과 소재는 풋내기 십대와 유부녀 사이의 불륜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17세의 작품이라고 보기에 놀랄만큼 심리 묘사, 내면 묘사가 엿보이는 작품이라고 생각되며 사랑과 행복에 대한 통찰, 비판적 시각, 주인공이 사랑과 방탄을 구별해가는 과정들을 예리하게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을 발표하고 나서 쏟아진 문단의 관심에 대해 작가 라디게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써놓은 글 일부를 옮겨본다.

신동 취급을받는 것은 작가로선 좀 달갑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잘못은 '열일곱살에 쓴 소설'이라는 실없는 말 속에, 기괴한 것이라고 까지는 하지 않으나 하나의 기적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닌지. 

아름다운 날의 저녁나절에 그날의 새벽에 대해 이야기하는 힘찬 매력을 비난하진 않지만 밤이 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새벽을 이야기 하는 흥미도, 전혀 다른 것이긴 해도 결코 적은 일은 아니다. <누벨 리테레르, 1923년 3월 10일 호>

밤이 오기까지 아직도 멀었는데 새벽에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

이제 새벽에 대해서 밖에 얘기할 수 없게 된 작가.

이 작가 레몽 라디게에게 신동이란 호칭을 붙여준 사람은 장 콕토였고, 라디게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비탄에 빠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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