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게 하고 싶은 말
허리쯤에서 꽃 무더기라도 필 생각인지
새삼 잊었던 기억이 몸이라도 푸는지
녹색의 살들이 늘어질 대로 늘어져서
팽팽해지는 오후
녹색의 말굽들이 총알처럼 날아다니며
횡설수설 나를 잡아당긴다
슬플 겨를도 없이 구석을 살아온 내게
어떤 변명이라도 더 해보라는 듯
여름은 내게
베고 누을 저승을 찾으라 한다
구름 사이로 모르는 사람들이 환하게 웃는다
누구의 유족인가 싶은데
문상 차림 치고는 너무 설레는 표정이다
큰 나무 뒤에서 혼자 늙어가는 개복숭아는
제 식구들을 욱욱 게워내고 있다
다 늙은 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무엇을 먹는 건지 게워내는 건지
나는 못 본 채 지나간다
그렇게 몇 개의 골목을 지나면서 생각한다
어디쯤에서 그늘을 오려내고 그 자리에 숨어 이 계절을 지나가야 하는지
오려낸 자리마다 더 깊은 변명이 부글부글 끓어도
함께 썩어가자고
엎드려 울기나 하자고
이 세상 모든 꽃이 유족처럼 나를 향해 필 때까지
나는 캄캄한 사연을 말하지 않으려는 중이다
- 이 승희 시집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중에서 시 "여름에게 하고 싶은 말" 전문 -
(※ 줄바꿈은 제가 옮겨 적으며 한 것이고, 원문에는 줄바꿈이 없습니다.)
작년에 사서 읽다가 다 못 읽은 시집
올 여름에 마저 읽으려고 한다.
'시를 읽는다'라고 쓸때마다 망설여진다.
시를 읽는다는 말 말고 더 적절한 말이 없을까.
시를 품어본다? 마음에 담아본다? 마음을 담궈본다? 물들어 본다?
이 시집 말고 다른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는 전권 필사를 해본 적도 있는,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