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0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의 문턱을 넘어본 사람이 하는 말을 그런 경험 없는 사람의 상식과 선입관만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 안될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의 결말은 보통의 독자들이 예상하는 것에서 비껴가 있었다. 

가스실 굴뚝 옆에서의 고통스러운 휴식시간에도 행복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고, 수용소에서의 삶이 더 순수하고 단순했으며, 사람들이 묻는다면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 얘기해 주어야 할 것 같다며 맺는 주인공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상식과 선입관을 넘어서야했다. 

2차세계대전 당시 저자는 열네살의 나이에 죽음의 수용소를 경험하고 그로부터 삼십년이 넘은 마흔 다섯의 나이에 그 경험을 한권의 책으로 완성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열네살 죄르지는 아빠가 노동 봉사 명령을 받아 돌아올 기약없이 집을 떠난후 새엄마와 둘만 살게 되는데 아빠가 집을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죄르지 역시 학교 대신 노동 봉사장으로 일을 하러 다니게 된다. 버스를 타고 일터로 가던 어느 날 아침 영문도 모르고 버스에서 하차 명령을 받고 어디론가 이송된다. 그렇게 갑자기 소환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롤 끌려갔고, 이어서 독일 부헨발트 수용소와 차이츠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렇게 1년 여 시간을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 수용소에서 풀려나 살던 곳 부다페스트로 돌아온다. 

작가 임레 케르테스가 13년 걸려 집필하여 1975년 출판되었고 이후 2002년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지는 그의 첫 소설이자 자전적 대표작이 된 <운명>은 그 일년 동안의 이야기이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되고서도 자기가 어디에 와 있고 왜 그곳으로 이송되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소년이던 죄르지는 하루만에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해가기 시작한다. 어떤 냄새 때문이었다.


그때 우리는 어떤 냄새에 심각하게 주목해야 했다. 딱히 무슨 냄새라고 말하기가 어려웠지만 달달하고 끈적끈적한 냄새에 우리에게 약간은 익숙한 약품도 섞인 듯 했는데 아무튼 그 냄새 때문에 조금 전에 먹은 빵이 목구멍으로 다시 올라올 것 같아 거북했다. (117쪽)


냄새의 출처는 굴뚝이 높게 솟아있는 가죽공장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이었고 그 굴뚝에서 뿜어내는 연기가 냄새의 원인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가죽공장이 아니라 시신을 태우는 화장터라는 것도 곧 알게 된다. 죄르지처럼 끌려온 사람들 중에 의사가 봐서 부적합 판정을 내린 사람들은 바로 소각처리 되는 곳이다. 

독일로 갈 사람에 지원하여 아우슈비츠에서 독일의 부헨발트 수용소로 옮겨갔고, 거기서 급성결체조직염이라는 지독한 병에 걸려 다시 차이츠 수용소로 옮겨진다. 시키는대로, 주는대로, 죽은듯이 존재해야하는 수용소 생활에 적응해가며 버텨나갔다고 하지만 존재로서의 생각과 느낌은 사라져간다.

고통을 호소해도 소용없는 상처 치료, 마취없는 수술, 그냥 흘러가듯이 겪어낼 뿐이다. 그러면서 수용소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아간다. 그렇게 멈춘듯 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알게 된다. 적응이라고 한 상태가 사실은 어떤 상태를 뜻하는지.


그날이 끝나갈 무렵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크게 손상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날부터 나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그날이 마지막 아침일 거라고, 움직일 때마다 더는 움직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여전히 걷고 움직이고 있었다. (185쪽)


여기서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되었다'는 것은 물론 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섰다는 느낌. 이제는 더이상 희망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떨어져버렸다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다음은 이 아이가 수용소 생활에 적응해간 결과 평화와 안정을 찾게 되었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도저히 더 이상 심각해질 수 없는 일들이 있고 그런 상황들이 생기기도 하는 것 같다. 나는 많은 노력과 부질없는 시도 끝에 시간이 흐르면서 평화와 안정을 찾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중요하게 여기던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졌다. 예를 들어 점호를 받다가 피곤해지면 진흙이나 웅덩이가 있는지 보지도 않고 자리를 잡고 앉아 버렸다. 추위나 습기, 바람이나 비도 나를 막지 못했다. 이런 것들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느낌조차 없었다. 배고픔마저 사라져 버렸다. 먹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보이는 대로 입으로 가져갔지만 말하자면 그것은 재미 삼아 기계적이고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일할 때도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두들겨 팼지만 그래 봐야 더 이상 어쩌지 못했다. 나는 한 대 맞으면 바로 땅에 누워 버렸다. 그러고는 금세 잠이 들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187쪽)


이 아이가 말하는 평화와 안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수 있다. 아무 느낌없는 상태, 살아있음 조차 느낄 수 없는 상태.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게 되는 상태.


'시체'라는 표현을 그때까지는 죽은 사람에게만 쓰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나도 그런 모습으로 아직 살아 있고 완전히 꺼질 듯 말 듯 깜빡거리지만 여전히 내 안에 이른바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내 몸이 그곳에 있고 나는 내 몸에 대해 속속들이 알았지만 문제는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199쪽)


여기까지는 그냥 읽었다. 정작 눈물이 나오려고 한 것은 몇 페이지 더 넘어가서였다.


어디에선가 쨍그랑거리는 익숙한 소리가 마치 꿈속에서 들리는 종소리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니 저 아래 쪽에서 솥단지를 지고 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어깨 위에 막대기를 멨고 막대기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솥단지가 올려져 막대기와 솥단지의 무게 때문에 끙끙댔다. 공기 중에 멀리 퍼져 있는 떨떠름한 냄새로 보아 순무 수프임에 틀림없었다. 이 광경과 향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가슴이 아팠다. 이미 굳은 가슴속에서 파도가 밀려오듯 갑자기 강렬한 감정이 일었고 나는 차갑고 축축한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을 쏟아 냈다. 나는 통찰력을 발휘해 신중하고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생각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때 가슴속에서 한 가지 욕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그 욕망의 비합리성 때문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더 끈질기게 욕망이 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것은 이 멋진 강제 수용소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204쪽)


차라리 죽는게 나을 강제수용소이지만 그곳이라도 좋으니 더 살고 싶다는 욕망이 다시 꾸물거리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애써 부인하려 한다. 하지만 아직 붙어있는 목숨은 그래도 더 살아보고 싶다고, 아직은 죽은게 아니라고 마지막 몸부림치듯 일깨워주는 것을 알고 부끄럽고 가슴 아파 눈물을 쏟아내는 죄르지. 그의 눈물에 비할 것이 못되지만 죽으려고 포기하는 사람보다 그런 극단의 순간에서도 이렇게 다시 살아보려는 마음이 꿈틀대는 것을 볼때 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은 왜일까. 


2차세계대전의 종말과 함께 죄르지는 살던 곳 부다페스트로 돌아오게 된다. 돌아와보니 살던 집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살고 있고 노동봉사로 끌려가다시피했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으며 새어머니는 재혼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죄르지를 알고 있는 동네 노인들은 죄르지에게 끔찍했던 과거는 다 잊으라고, 그래야 네가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데 죄르지는 왜 그래야하냐고,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들이 끔찍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하여 동네 노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우리는 항상 이전의 삶을 이어 갈 뿐 결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는 없다. 나는 다른 길이 아닌 주어진 나의 운명 속에서 끝까지 정직하게 걸어왔다고 주장했다. (281쪽)


죄르지는 운명이란 따로 정해져있는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곧 운명이라고, 운명이라는 말 대신 나 자신의 걸음을 계속 걸어온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정직하게 계속 걸어온 나의 행보, 나 자신, 그것이 있을 뿐이다.

그가 하는 말을 못알아 듣는 사람들. 수용소를 겪고 나온 다음의 삶이 원래대로 복귀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시작이다. 


어찌보면 그곳 (수용소)에서의 삶이 더 순수하고 단순했다.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는 정말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284쪽)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 안에 차오르는 각오가 점점 강해져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바로 도저히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삶을 지속해 가겠다는 각오였다. 어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를 보면 정말 기뻐하실 것이다. 불쌍한 어머니. 내 기억에 어머니는 내가 엔지니어나 의사 아니면 그와 비슷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나는 틀림없이 어머니가 원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극복하지 못할 불가능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나아갈 길 저만치에 행복이 피해 갈 수 없는 덫처럼 숨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안다. 가스실 굴뚝 옆에서의 고통스러원 휴식 시간에도 행복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내게 수용소에서의 역경과 끔찍한 일들에 대해서만 묻는다. 나에게는 이러한 경험들이 가장 기억할 만한 일들로 남아 있는데 말이다. 그래, 사람들이 난중에 묻는다면 그때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 얘기해 주어야 할 것 같다. (285쪽)


저자는 그런 각오로 남은 생을 분투하며 힘겹게 살아왔을지 모르겠다.


이 책의 원제는 '운명'이 아니라 '운명없음'이라고 해설에서 번역자는 밝히고 있다. 고민하다가 제목을 그냥 '운명'이라고 했노라고. 

원제가 왜 '운명없음'인지 알겠다. 내가 걸어온 길. 살아있다는 느낌조차 없이 살아있는 시체로 존재하고 있던 순간에도 지속해갔던 걸음. 운명대신 그가 믿는 것은 그 경험이다. 운명대신 되돌아볼수 있는 그 경험을 믿는다. 

운명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곧 운명이며, 어렵고 힘겨운 것은 과거의 끔찍한 경험에서 벗어나는 작업이 아니라 지금 현재 존재를 지속해가는 문제이다. 

20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전까지 헝가리 문학계에서도 문학가로서의 존재감이 미미했을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했고 병마와 싸워야했으며 결혼 생활도 순조롭지 못했다고 한다. 노벨문학상을 계기로 뒤늦게 세상에 알려진 그는 2016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