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작가의 소설 세권이 몇주만에 내 책꽂이에 나란히 꽂히게 되는 일은 흔치 않았다. 백수린 작가의 <여름의 빌라>, <친애하고 친애하는>, <폴링 인 폴>이 차례대로 꽂혀있는데 이것은 내가 읽은 순서이고  책이 출판된 순서대로 하자면 <폴링 인 폴>, <친애하고 친애하는>, <여름의 빌라> 이렇게 되어야 맞다.

작가 백수린은 1982년생 올해 서른 아홉. 2011년 서른 나이에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으니 올해로 등단 9년째이다. 등단하고도 이름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예작가들이 적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백수린은 그동안 수상 경력도 많고 대중에게 이름 알리는데에도 성공한 작가에 속하지 않나 싶다.

이 책 <폴링 인 폴 (Falling in Paul)>은 2010년에서 2013년 사이에 발표한 아홉 편의 단편을 모아 2014년에 출간된 단편 소설집이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등단작이 실려 있는 책이라니까 올해 발표된 <여름의 빌라>에서의 그녀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지 알겸 읽게 보고 싶어졌다.

「감자의 실종」에서 실종된 것은 감자라는 물체가 아니라 감자라는 언어였다. 어린이 책이긴 하지만 미국 작가 Andrew Clements의 <Frindle>이 바로 연상되었다. 'frindle'이 무슨 뜻일까 궁금하게 만드는 이 책에서 보면 아이들이 어떤 물체의 이름을 지금까지 알려진 이름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하는 내용이 나온다. 「감자의 실종」에서는 이것이 소통이 불가능해지는 문제로 이어지지만 <Frindle>에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어떤 일의 발단이 꼭 한 방향으로 흘러가서 같은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비슷한 소재를 가지고 작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수 있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자전거도둑」이 바로 작가의 2011년 등단작인데, 비슷한 처지의 세여자가 한 공간에서 한 공기를 숨쉬고 살다가 그중 한명이 궤도에서 벗어나려는 듯 싶을 때 다른 두 사람이 느끼는 심리를 그렸다.

사실 이 책을 펼쳐서 제일 먼저 읽은 것은「폴링 인 폴」이었다. 그리고 지금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으로 남는 것도 이 작품이다. 기존 관계에 큰 변화를 일으키게될 결정적이고 도발적인 행동, 그 결과로 관계의 뒤집어짐, 이런 것은 좀처럼 백수린 작가가 시도하는 서사 구조가 아니라고 본다면 이 작품 역시 가능성과 아련함으로 남고 그래서 혹자는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고 혹자는 마음에 들수 있을 것이다.

「부드럽고 그윽하게 그이가 웃음짓네」이 알쏭달쏭한 제목의 단편에는 돌연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난 여자와 베를린으로 그 여자를 찾아가는 남자가 나온다. 베를린이라는 타지, 여자 혼자 유학이라는 설정보다 주목할 것은 그것이 두사람 사이의 이해 능력에 어떻게 변화를 일으켜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서서히,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직도 두 사람 사이의 애정은 여전하다고 믿고 있고 달라질 어떤 사건도 없었음에도, 사랑한다는 감정도 예측 가능한 상황에서만 확신할 수 있을 뿐 얼마나 불안정한 감정의 한 상태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밤의 수족관」은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날 수 있는 일을 촘촘하게 구체적으로 잘 살려 작품화해내는 작가의 역량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작품이었다. 과연 잃어버렸다는 아이의 존재는 실재인가 환상인가. 그것은 어쩌면 둘째 문제일 수 있다. 본인마저 아이의 존재를 확신할 수 없게 되고 마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내 존재도 불확실하게 된다는 것일수 있다.  

「까마귀들이 있는 나무」는 책 뒷편의 해설에서도 특별히 언급하지 않은 작품이다. 백수린 작가 답지 않게 모호한 구성, 모호한 의미전달로 읽혀지기 때문일까? 작품에서 '당신'이라고 지칭하는 대상은 독자, '신인소설가' 또는 '나'라고 지칭하는 것은 작가로 보인다. 작가는 3인칭관찰자가 되어 주인공 '리'의 행적을 그리고 있다. 건설회사에 입사했다가 아프리카로 파견을 나가는 '리'는 그곳에서 '킴'이라는 여자를 만나 함께 살게 되는데, 말이 함께 살기지 쉽게 말하면 얹혀 살기이다. 끝내 관계를 지속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리는 궁에서 관광안내 가이드 일을 하게 되는데 가이드해줄 팀을 기다리던 중 킴을 연상시키는 모습의 한 여자를 보게 되어 자진으로 가이드를 해주며 그녀를 쫓아다니며 킴과의 일을 회상한다. 킴과의 관계도, 미지의 여자의 정체도, 종잡을 수 없어 혼란을 겪는 과정은 결국 천년된 은행나무를 에워싸고 앉아있는 까마귀떼를 올려다보며 끝나는데, 그것은 마치 작품 속에서 이 소설이 예술적 가치가 있을까 고민하는 것 만큼이나 모호하다.

작가의 2011년 등단작「거짓말 연습」에서 거짓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거짓말과는 좀 다를 수 있다. 말 꾸며대기, 나아가 이야기 지어내기라고 확장 해석하는게 맞을 것이다. 동시에 말 꾸며대기나 이야기 지어내기라 거짓말과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가 되물어볼수도 있겠다. 외국어를 이용해 대화를 하다보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나 적당한 어휘를 찾아내기 어려워 비슷한 언어로 뭉뚱그려 대충의 뜻만 전달하는 수가 있고 이럴때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마음의 저 한구석에 찌꺼기처럼 가라앉아 고여있게 된다. 꼭 외국어가 아니어도 있을 수 있는 상황인 것은 작품 속 주인공의 엄마의 경우에 해당된다. 자신의 밝히기 싫은 과거를 자꾸 묻는 사람들에게 언제부터인가 엄마는 살을 붙이고 각색을 하여 말하기 시작한다. 작가는 이런 것을 꼭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정확한 말로 적절하게 표현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과정을 거칠 수 있는 것이고, 아예 입을 다물고 말을 거부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유령이 출몰할때」는 사실 등단 이전에 1년 먼저 발표되었던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백수린 작가 답지 않게 설정과 서사가 약간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꽃 피는 밤이 오면」꽃 피는 봄이 아니라 밤이다. 희망과 재생의 의미로서 봄이 아니라 꽃이 피어봤자 밤이라는 말인가? 궁금해하며 읽기 시작했다. 지방대 출신으로 자동차 회사에 근무하던 한 남자가 있다. 의욕을 가지고 시작한 회사 생활이지만 경기 불황과 구조 조정의 압박 속에 일해오던 중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 실어증에 걸리는 일이 일어난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이 남자를 기다리는 아내가 있다. 형편이 좋아질때까지 아기 갖기도 미루며 동물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하고 있던 아내이다. 언젠가 남편으로부터 들었던, 억울한 죽음을 당한 남편을 위해 남편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남편 회사 동료 아내를 떠올리며, 작업 중인 다큐멘터리 속 동물들의 고통과 공감에 대한 것을 생각하며, 언젠가 남편의 입술이 달짝여 말이 되어나오게 될 날을 기다린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마지막 문장을 '우리는, 괜찮을 것이다'라고 맺고 있지 않는가.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괜찮을 것이다라는 말의 뜻을 나는 어떤 결과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갖기로 한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희망할 것도 절망할 것도 없다. 희망이나 절망은 한 때의 느낌일 뿐, 그것 자체가 결말은 아니니까.

 

어쩌면 나는 그동안 백수린의 작품들을 통해 희망이나 절망에서 머물지 않는 법을 엿본 것일지 모른다. 희망, 절망, 그런 것들은 거쳐가는 과정이지 결론이나 결말은 아니다. 그래서 작가는 작품 속에서 극단의 절망이나 희망을 말하지 않았고 그렇게 맺지도 않았다. 그것이 작품의 서사적 안정성으로 나타날 수 있었고 그녀 작품을 읽으며 편안할 수 있게 했다. 어떤 문제적 인간이 주인공이든, 그들이 어떤 불합리한 상황 속에 놓이게 되든, 예리하게 포착해낸 상황도 작가는 그것을 교묘하게 안정적으로 이끌어간다. 그것이 다른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히든 그녀 작품이 가지고 있는 특징인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녀의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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