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수도사 - 유전학의 아버지 멘델의 잃어버린 삶과 업적
로빈 헤니그 지음, 안인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번역본이다.

함께 구입하긴 했지만 번역본이 있으니 아무래도 번역본으로 먼저 눈이 가긴 했는데 읽다가 번역의 원뜻이 궁금할때 함께 참고하며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유전학사, 아니 생물학사에 있어 가장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게 한 발견이라면 DNA보다 앞서 멘델의 유전법칙을 꼽아야 할 것이다.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것이 Nature에 발표된 것이 1953년이었고 멘델이 유전의 근본원리를 내용으로 한 논문을 발표한 것이 1865년이니 거의 10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후로 생명현상에 대한 이해 속도와 방향은 이전과 비교 될 바 아니었다.

그레고어 멘델. 1822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고 스무살 무렵 브륀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이곳은 현재 체코의 브루노에 해당하기 때문에 지금 그의 흔적을 보기위해선 오스트리아가 아닌 체코의 브루노를 찾아가야한다.

그는 결코 수월하지 않은 과정을 거쳐 수도사의 신분으로 빈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대학에서 딱히 생물학이라기 보다 물리, 화학, 수학, 동물학, 식물학 등 자연과학 제반을 공부하였다. 수도원으로 돌아온 그는 수도 생활과 함께 완두의 잡종 교배 연구를 시작하였다. 왜 그는 완두 잡종 교배를 연구하게 되었을까. 수도사인 그에게 그 연구를 해야하는 책임과 의무를 지워준 사람이 있었을리 없고 그런 자리에 있지도 않았지만 그보다는 그의 과학자로서의 성향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물과 현상을 보는 과학자로서의 눈이 궁금증을 일으켰을 것이고 궁금증에서 발전하여 더 알고 싶고 캐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이것이 요즘의 몇억 짜리 글로벌 프로젝트를 따기 위해 완벽한 연구계획서를 만들어내고 추진하는 욕구와 같을까?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만.

옆에서 도와주는 다른 수도사가 실제로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람은 없다. 그래서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유의 과정과 실험 과정을 거쳐 오늘날 멘델의 법칙이라 불리는 소위 3:1, 9:3:3:1 이라는 간단한 보편적 비율에 도달했는지 알 수 없다. 지금까지도 그의 실험에 대해 반론이 끊이지 않게 한 여지를 남긴 것이다. 완두라는 식물을 선택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었는지, 그토록 형질의 구분이 뚜렷하고 예외가 없는 식물을 골랐다는 것을 두고 그가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완두가 첫 실험 대상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식물로 시도했다가 그중 예외없이 딱 떨어지는 결과를 낸 식물인 완두를 나중에 골라서 논문을 쓴 것인지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의문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다. 딱 필요한 결과와 과정만 기록으로 남겼을뿐 모든 실험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오직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정확하게 실험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어떤 질서를 따라, 어떤 계절에, 그리고 브륀에 있는 성 토마스 수도원의 널따란 안마당의 정확하게 어디에서 그런 실험이 이루어졌는지 우리는 모른다. 멘델이 한 번의 재배 기간 동안에 몇 세대나 식물을 키워 냈는지, 얼마나 자주 온실에서, 또 얼마나 자주 정원에서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또한 우리는 그가 사용한 완두 식물의 총 개체수를 알지 못하고, 그가 작업할때 누가 그를 도와주었는지 아닌지, 아니면 가장 집중적인 실험이 행해지던 시기의 어떤 특별한 날에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멘델은 실험 일지를 쓰지 않았던 것 같고, 만일 그가 그것을 썼다면 그것은 뒷날 사라졌다. (163쪽)

읽으면서 나조차도 믿기 어려웠다. 실험의 성공 여부를 떠나 실험 하는 사람에게 기록은 기본이고, 그것은 실험의 진실성 여부를 가늠하는 제일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것은 실험자로서 상식이나 다름 없는데 실험 일지가 남아 있지 않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그의 실험 결과가 지금까지도 몇가지 예외를 남기고 잘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외적인 현상이라는 것들까지도 멘델의 기본 법칙들을 넘어서 더 큰 법칙으로 볼만한 것들은 아직은 없다는 것과, 이후로 밝혀지고 있는 유전학의 제반 현상들이 멘델의 기본 법칙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고 설명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1865년 <식물의 잡종에 관한 연구>라는 소박한 제목의 논문으로 10여년에 걸친 거의 혼자만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을때 그 누구도 제대로 주목한 사람이 없었다. 당시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지 얼마 안되어 (1859년) 가히 진화론의 찬반이 크게 대립해있을 때였고 그것이 과학계에 던진 돌풍이 가라앉기 전이었다. 멘델은 자기의 논문을 다윈을 비롯해 몇몇 유명한 과학자들에게 보낸 것 같으나 주목은 고사하고 제대로 읽어준 사람도 없는 듯 하다. 멘델은 그후 수도원 원장 직을 맡게 되면서 수도원 행정과 경영 문제, 세금 문제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결과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우연히 그와 같은 연구를 하던 세명의 각기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이들 역시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어서 이해 관계가 엇갈렸고 갈등도 많았는데 본격적으로 유럽을 넘어서 미국에까지 멘델의 이론을 전파한 것은 영국의 과학자 베이트슨이었다. 이 사람 역시 과학계의 아주 주류에 있던 사람은 아닌 것이, 평생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연구에 매진했지만 끝내 교수가 되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 책에서는 그를 수도사의 불도그 (The Monk's Bulldog)라고 부르며 책 후반부에 집중적으로 베이트슨의 업적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베이트슨 역시 멘델이 살아있는 동안 멘델과 교류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멘델이 세상을 떠난 것은 1884년, 베이트슨이 영국 왕립원예학회에 돌연변이 이론에 대한 강연 준비차 런던으로 가는 기차에서 각주에 인용된 멘델의 논문을 우연히 접하게 된 것이 1900년의 일이다. 1시간 동안의 기차 여행 중에 베이트슨은 멘델의 논문을 읽고 그 탁월함과 명료함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자신의 강연 내용을 완전 수정하였고 이후 멘델을 영어권 세계에 소개하게 되었다는 추측이다.

책 후반부엔 멘델의 결과를 뒤늦게 발견한 드브리스를 비롯해 베이트슨과 다른 주장을 하는 학파와의 논쟁 과정을 자세하게 기술하는데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그만큼 참고할 기록들이 멘델 자신의 연구에 비해 많다는 것이고 멘델이 얻은 결과가 얼마나 영향이 컸는지 말해주는 것이다. 토마스 모르건의 유명한 초파리 연구, 염색체라는 것이 어떻게 유전자가 위치한 장소로 알려지게 되었는지, 왜 이름이 염색체인지, 유전자 지도가 만들어지기까지, 책의 저자는 비교적 산만하지 않고 정확하게 잘 설명해놓았다.

 

멘델은 내게 늘 더 알고 싶은 과학자였다. 인간 멘델도 그렇고 그의 연구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그래서 그가 평생 봉직하고 실험했던 수도원을 찾아가보기도 했었다. 유전이라는 것에 대해 현장이 아닌 책상에서, 실험이 아닌 이론으로 추론하고 단정하던 시대에, 밭이든 정원이든 손수 실험하여 나온 결과로 유전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한 멘델이 아닌가. 그로부터 100년후 DNA가 유전 물질이라는 것을 알아내었고, 그후로 100년도 안 지난 지금은 그 DNA의 성질을 바탕으로 신종 코로나 진단을 하루에 수만건씩 하고 있지 않나.

멘델에 대한 관심은 생명과학에 대한 관심이고 그 본질에 대한 관심이라고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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