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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노벨상은 작가에게 주는 상, 맨부커상은 작품에 주는 상이다. 2018년 맨부커상, 2019년엔 전미도서 비평가협회상, 뛰어난 정치소설에 주는 오웰상을 받은 작품 밀크맨. 1962년생 북아일랜드 작가 애나 번스의 세번째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 이전엔 그리 인정을 못받다가 밀크맨으로 맨부커상을 수상하면서 그야말로 일약 세계적 작가 대열에 오른 그녀의 첫 장편소설 <노 본스>가 그랬듯이 <밀크맨>도 북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북아일랜드 (North Ireland). 영국을 United KIngdom 이라고 할땐 포함되지만 Great Britain 이라고 할땐 포함되지 않는 땅이 북아일랜드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저항과 투쟁 운동이 있어온 곳이기도 하다. 이 소설도 그런 투쟁이 예외없던 1970년대 북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목의 '밀크맨'은 우유배달부라는 뜻도 있고 소설 제목으로 쓰인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알고 보니 이 작품 속에서 밀크맨은 북아일랜드 무장 독립 투쟁 조직의 주요 인사의 이름이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 쪽엔 '수호파 (친영국파)', 다른 한 쪽엔 '반대파 (북아일랜드 분리 독립파)' 두 세력이 대립하며 살고 있는, 수시로 유형 무형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마을이 배경이다. 1인칭 서술의 화자로 나오는 열 여덟살 소녀는 길을 걸으면서도 책을 읽는 걸 좋아한다. 그날도 다름 없이 아이반호 책을 읽으며 걷고 있는데 지나가던 차가 옆에 서면서 태워주겠으니 타라고 한다. 모르는 사람이다. 편하다는 이유로 모르는 사람의 차를 덥석 탈 정도로 분별력 없는 주인공이 아니다. 거부하고 집에 돌아와 그 얘기를 가족에게 한 것, 그것이 시작이었다. 차에 타라고 제안했던 그 남자가 종종 예기치 않은 장소와 시간에 주인공 앞에 불쑥 나타나는 일이 일어났고, 그리고 마흔 한 살 그 남자와 주인공 사이에 불륜의 가능성에 대한 스캔들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불륜은 커녕 제대로 한번 만난 적도 없다는 주인공의 말을 믿으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족도, 그녀의 엄마 조차도, 그녀의 남자친구도. 소문은 이미 사람들의 추측과 각본대로 정해져 있었고 그 각본대로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려는 사람들의 눈초리만 있을 뿐이다. 이것에 대해 예민하게 굴면 오히려 사람들의 각본대로 진행되는데 일조하는 것이라고 보고 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무심한 척 하려는 열 여덟살 소녀는 그저 평범한 열 여덟 살 소녀가 아니었다. 예민하고, 분별력도 있고, 똑똑하고, 하지만 자기를 드러내면 안되는 사회에서 잘 버텨내야 하는 삶을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정치적 갈등, 종교적 갈등에 더해서 젠더 갈등까지 헤쳐나가야 하는 이중의 고통을 열 여덟살 여자 아이가 겪어가는 모습은 이쪽 저쪽 길 하나를 두고 다른 생각과 이념을 가진 집단이 공존해 나가야 하는 지금의 모습이기도 하며, 미투 운동으로 그나마 가려졌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 젠더 갈등의 폭로이기도 하다.
스토리 라인에 더불어 이 작품의 독특함과 출중함은 작가의 문체에 있다. 주인공의 이름은 '나'로 소개될뿐 한번 거론된 적 없고, 남자 친구의 이름도 '어쩌면-남자친구', 주인공을 괴롭히는 남자 아이의 이름은 '아무개 아들 아무개', 이런 식으로 익명으로 나타내는데 이런 방식으로 작가는 본명보다 더 인물들의 정체성과 주인공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효과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게 살아가는데 더 유리할지 모르는 사회 속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작가의 유머 코드가 소설 여기 저기 살아있다는 것은 기대않던 즐거움이기도 했다. 형제많은 집안의 가운데 서열이었던 주인공에게 아직 어린 동생들은 책 읽어달라는 부탁을 자주 하는데, 읽어달라고 들고온 책의 제목이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인 것을 보고 동화책이 아니라 당황하는 주인공. 하지만 곧 알아차린다. 책 내용이나 대화에 관심있어서가 아니라 전래동화 같은 제목에 흥미를 느껴서 골라온 책임을. 그래서 읽어주는 중간 중간에 책 제목을 적당히 섞어서 자주 되풀이해주며 동생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있는 주인공의 재치에 웃음이 나온다. 끝까지 그냥 남자친구가 아니라 '어쩌면' 남자친구였던 남자친구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대목, 밀크맨과 주인공 사이에 소문이 일기 시작할때 엄마의 반응, 그리고 나중에 엄마가 보여주는 반전. 블랙코미디 같은 요소가 작품 전체에 깔려 있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무엇보다 눈여겨 보게 된 것은, 드러내지 않고 감추며 살아야 하는 인간, 그들의 사회를 묘사하는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묘미이다. 이쪽 저쪽 세력 사이 언제든지 터질 수 있지만 드러나지 않고 내재되어 있는 동안의 보이지 않는 긴장과 공포는 실제 터지는 폭력은 아니지만 제2의 폭력이었고, 그런 사회에서 나의 본심과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며 사는 것이 낫다는 사람들의 잠재 의식, 내 본심이 어떠하든 겉으로 표현되는 것은 그저 평범 이상을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은 요즘 사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때문이다. 필요 이상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TMI 일뿐. 그런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자기 본심과 진실을 어디에, 어떻게 발산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런 사회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과연 그 사람의 진심과 얼마나 일치할까.
북아일랜드 문제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가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애나 번스는 흔한 주제를 흔하지 않은 방식, 그녀만의 방식으로 소설을 완성했다. 이렇게 대화가 적고 나레이션 위주로 거의 500쪽까지 끌고 가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주의를 끄는 작품도 흔하지 않다. 한 신문사의 서평대로 '대단한 성취'다.
작가를 흉내내서 나도 '어쩌면'을 붙여서 불러본다.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앞에 붙여보다가 (어쩌면-친구, 어쩌면-애인), 추상명사 앞에도 붙여서 불러 본다. 어쩌면-행복, 어쩌면-슬픔, 어쩌면-진실, 어쩌면-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