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흙 문학과지성 시인선 280
조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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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인의 수필집 '벼랑에 살다'를 오래 동안 읽고 싶은 책 리스트에 올려놓고 결국은 시집을 먼저 읽게 되었다. 선입견이었을까. 시의 여기 저기서 '벼랑'의 뉘앙스가 느껴진다. 더 이상 발길을 내디딜 수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 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디로 가야할지를 결정할 수 없어서 못 내디디는 발걸음 말이다. 누가 옆에 있어 함께 생각을 주고 받고 동행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 시인은 차라리 외로움을 곱씹으며, 자의식으로 무장하며 고집스럽게 혼자 가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이 수십 편의 시들을 탄생시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이 시인의 혼자 서기는 대부분 시들의 바탕을 이루고 있고, 섣불리 짐작컨대 시 뿐 아니라 그녀의 모든 글들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냥 살아지는 삶이 아니라 믿음이 나를 썩지 않게 하여 살아내는 삶 ('믿음이 나를 썩지 않게 한다' 67쪽), 잠깐 본 세상은 가득 찬 밥그릇 같을까 라고 보는 회의적이고 허무적 시선 ('잠깐 본 세상' 66쪽), 포식하고 싶을 때 굶주리고, 행복을 생각할 때 불행했고 일해야 할 때 쉬어야 했던, 삶의 어긋남 ('어긋난 삶' 23쪽).
삶이 주는 무게라는 것의 정체가 무엇일까, 삶의 본질이 과연 무엇일까, 이런 류의 무겁고 쓸쓸하기 짝이 없는 시들을 읽게 되면 또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마음 먹기에 따라 다 떨치고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말이다. 가볍게 소풍나왔다는 마음 가짐으로 살다 간 다른 시인도 있지 않았던가? 그렇게 살다 갈 수 있는 사람은 보통의 내공을 넘어서거나, 천성을 그렇게 타고난 특별한 소수만 누릴 수 있는 것일까. 아마도 보통 사람들이 거쳐가는 길이란 오히려 이렇게 외롭고 처절하고 쓸쓸한 길이란 말인가. 벼랑을 걷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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