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하는 시간 - "삶이 힘드냐고 일상이 물었다."
김혜련 지음 / 서울셀렉션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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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고 보는 타인의 삶은 평범하고 순탄해보인다.

그러나 타인이 아닌 지인의 관계가 되어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 세상에 편하기만 한 삶은 없나보다 깨닫게 된다.

이 책을 쓴 저자의 일상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래보였을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더랬다. 50쯤 되는 나이가 되면 사는 것이 타성에 붙을지언정 사는 것 자체에 대한 의문과 갈등은 없을 거라고. 해결되었든지 포기했든지,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안그랬다. 방향만 다를 뿐이지 사는 건 여전히 모르겠고 어렵고 확신이 없었다. 앞으로 남은 날이 더 줄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젊을 때보다 더 조급해지고 막막했다.

글쓴이는 산다는게 고통스러웠다. 현재의 삶이 고통스러워 과거를 들여다보고 내 발이 닿고 있지 않은 다른 세계를 들여다보고 갈망했다. 지금 여기와 다른 그 평화로운 곳은 어디이고, 그곳에 다다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끊임없이 묻고 찾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찾은 곳이 어디일까. 이 책의 제목이 말해준다. 밥 하고 청소하고 빨래 하고 산책하는, 그 사소해보이는 일상 속에 평화가 있었다.

 

나는 그런 인간이었다. 나는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온 '한 줌의 평화'앞에서 그것조차 누릴 수 없는 몸과 마음을 지닌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의 몸과 마음은 불안과 긴장에 길들여져 있다. 피해의식과 분노에 익숙하고 늘 초조하고 조급증에 시달린다. 자학과 갈등, 무기력에 오래 길들여져 있다. 삶이 전쟁터니 언제나 아드레날린 과잉 상태로 교감 신경만이 일방적으로 설쳐댄다. 지루한 일상을 견디지 못해 일탈한다.

일탈의 자유, 잠시 오는 해방감의 단맛을 보기 위해 일상을 파괴한다.

평화는 낯선 무엇이다. 전쟁에 길든 몸과 마음은 평화를 지루함이나 권태, 우울로 인식한다.

나의 쓸쓸함과 우울은 평화를 살아보지 못한 자가 치러야 할 당연한 삶의 몫이었다. (73, 74쪽)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불쌍한 시계추와 같다고 했다. 욕망으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거나, 욕망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상태에 이르면 권태로움에 못견뎌한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그토록 평화를 추구하면서도 평화에 이르면 그것을 지루함, 권태, 우울이라며 낯설어하고 벗어나고자 한다.

존재는 사유에 우선한다. 왜 사느냐는 물음 이전에 존재가 있었다. 그러니까 살아야 하는 것은 그 어느 사유의 결과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넌 태어나지 말아야 했다는 욕설을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로부터 듣고 자라고, 엄마로부터 안정이 아닌 불안을 배우며 자란 어린 시절은 글쓴이에게 늘 자기 결핍의 원천이었다. 그 지독한 자기 결핍이 내 안의 아귀가 되어 내 삶을 고통스럽게 했다. 그것은 어떤 명상 프로그램이나 수행 과정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마음의 문제 뿐 아니라 몸에도 이상이 왔다. 그래서 몸을 돌보기 시작했다. 내 몸을 위하고, 내 몸을 위해 밥을 짓고, 어떻게 하는 것이 몸을 위한 것인지 생각하고 행하기 시작했다.

 

내가 일상을 살기가 왜 그리 어려웠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단지 일상이 지루하고 단순 반복이어서만은 아니었다. 몸의 감각을 잃은 것은 일상을 잃은 것이다.

밥하고 청소하고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일어나는 감각의 리듬, 삶의 느낌을 잃은 것이다.

나는 일상을 모르는 사람, 일상이 없는 사람이었다. 일상의 사소한 기쁨, 몸의 움직임을 통해 삶의 즐거움과 삶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일상의 즐거움과 든든함은 없고 일상의 부정적 측면만 있는 사람. 그런 기쁨 없이 고통과 무거움, 견뎌내야만 하는 그 무엇으로 삶을 사는 것이다.

늘 진지하기만 하고 재미없는 삶, 쓸데없이 처절한 삶,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 무언지 모르는 삶. 몸을 통해 바라본 나의 삶이었다. (113, 114쪽)

 

저자는 몸의 힘을 보여주는 사람들로 일흔, 여든이 넘은 할머니들을 들었다. 이분들의 힘은 어떤 이론이나 관념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밥해 먹고 농사짓고 자식 기르는 그 일상이 전부인 사람들의 힘, 몸의 힘인 것이다.

일상의 힘. 슬프지만 매일매일 몸을 일으키고 밥을 챙겨먹는다.

 

좌절은 관념적 지식인들에게나 있는 거지 '밀양 할매들'같은 민초에게는 그런 개념이 없다. 힘들지만 그냥 사는 거다. 밥해 먹다 나가 싸우고 또 밭 매고, 싸우다 울고, 울다가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해 나고, 비 오고, 바람이 불듯이 몸으로 사는 거다. '몸에 쌓인 힘'은 난세를 주파해가는 힘이 된다. (131쪽)

 

천지불인 (天地不仁). 자연은 내 감정이나 상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인간이 어떠하든 자연은 제 갈 길을 간다. 자연이 나와 무관하게 변함없다는 사실은 든든하다.

내가 아무리 고통과 슬픔 속에 있어도 자연은 그토록 생기롭다는 사실이 절대적 위로가 된다. 내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는 것, 인간의 조건 안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 (209쪽)

 

세상 모든 것을 볼때 자기 결핍이라는 눈을 통해서 볼때 삶은 괴로움 자체였다. 지독한 자기결핍이 사라지자 아픔이나 분노를 투사해 세상을 보지 않게 되었다. 세상 그대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자연을 보며 으로 사는 것. 저자는 그렇게 평화를 찾는다. 인간 관계에 갇혀 생각으로 사는 대신 말이다.

생명을 가진 것들은 모두 생명을 이어가려는 대전제를 쫓는다. 이어갈까 끝낼까 고민하지 않는다. 인간도 본성적으로 그렇다. 그것이 자연스럽다.

 

지리산에서 장마철이면 거대한 나무들이 급류에 휩쓸려 내려오곤 했다. 그 나무들이 계곡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면 경이로웠다. 뿌리 뽑힌 나무가 잎을 틔우고, 다음해 봄에 꽃을 피웠다.

어떤 경우에라도 생명을 생명으로 피워내는 힘, 뿌리가 뽑히고 쓰러져 누웠어도 생명이 다할 때 까지 생명인 그것. 그것이 생명의 '근원적 명랑성'이라고 나는 믿는다. 노숙을 하며 빌어먹어도 한 끼의 밥을 먹게 하는 힘, 따뜻한 햇살 속에서 기지개를 켜고 햇볕을 향해 저절로 몸을 돌리는 그 힘 말이다. (241쪽)

 

저자가 그토록 고민하고 수행하며 찾고자 했던 삶의 의미는 저 너머 밖에 있지 않았다. 밥 먹고 청소하고 빨래를 개는 평범한 일상 자체였다.

 

온갖 관념의 세계를 헤맨 끝에 만난 게 '아무것도 아닌' 세계라는 역설. 그 역설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일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겪는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직관. 그런 것이 글을 시작하게 했다. 그러니 내가 쓰고자 하는 것은 관념에서 구체적인 일상으로 내려오는 과정이다. (313쪽)

 

저자의 후기이자 이 책의 요점이다.

 

삶의 의미를 모르겠거든,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거든, 멀리서 답을 구하지 말고 내 일상을 그대로 살아가기를 계속 할 일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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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8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9-09-19 05:03   좋아요 0 | URL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 그런 소리를 퍼부어야 했던 그 엄마도 그 소리를 듣고 자란 저자의 삶 만큼이나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저자의 자기 결핍은 보통 사람의 경우 평생 벗어나지 못하고 삶을 마감하는 수가 많을 것 같은데 저자의 경우는 거기서 자유로와질수 있어서 다행이어요. 오랜 시간과 노력을 댓가로 치르긴 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