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숲 - 긴팔원숭이 박사의 밀림 모험기
김산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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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비숲' 은 비가 많이 오는 숲, 즉 열대 우림을 말한다. 

과학서적? 소설?

동물학자 김산하가 인도네시아 열대 우림에서 긴팔원숭이를 연구한 이야기. 순수과학서적보다 재미있고, 소설 못지 않는 재미와 가독성이 있다.

이 책에 대해서는 출판되었을 당시부터 저자 인터뷰를 듣고 알고 있었는데 들으면서 책 내용도 내용이지만 일단 저자가 참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짐작했다. 책을 읽어보니 역시 그렇다.

 

 어릴 적부터 나는 당돌한 인생철학이 하나 있었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말자. 왜 먼 미래 때문에 소중한 현재를 낭비하나? 그냥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살피고, 주변 시선일랑 싹 무시하고 하는 일을 즐기자. 학원에서 몇 년 앞을 예습하던 징글징글한 동년배들에 대한 반감의 표시였을까? 뭐가 됐든 나는 동물이 좋고, 좋은 게 당연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었다. 적성 검사의 장래 희망을 묻는 칸에는 늘 동물학자라, 서명하듯이 적어 내곤 했었다. 그리고는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았다. (43쪽)

 

대학 진학할때 동물에 대한 공부를 하는 곳이면 아무데나 원서를 써달라고 해서 가게 된 자원동물학과. 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거기서 배우는 것은 얼마나 동물을 인간에 유리한 자원으로 잘 이용할까에 집중되어 있는 것에 실망했고 그러던 참에 동물학과 최재천 교수가 연구하는 분야를 알게 되어 (동물 행동, 생태) 내가 하고 싶은건 이런거다 싶었다고 한다. 대학원 진학을 동물학과로 했고 지도교수인 최재천 교수로부터 영장류에 대한 연구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언젠가 사석에서 나의 이런 연구 주제를 설명한 일이 있었다. 뜬금없이 받은 질문은 대체 이런 연구를 왜 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긴팔원숭이가 밀림에서 뭘 먹건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그러게요?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사실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쁜 우리에게, 눈앞에 있지도 않고 이 나라에 속하지도 않은 무슨 원숭이의 밥 먹는 얘기는 더할 나위 없이 우리와 무관한다. 내 당장의 일상은 도시의 건물 속에, 내 책상과 모니터에서 벌어진다. 그런 직접적인 의미에서라면 물론 긴팔원숭이와 우리 사이에 상관관계 따위는 없다.

하지만 어린이 책을 들춰 보라. 숲 속의 호랑이가 어흥 포효한다. 예쁜 색깔의 음료수를 골라 보라. 열대의 태양 아래 영근 과일이 상큼하다. 영화관에 가서 앉아 보라. 울창한 정글에 사는 종족이 등장한다. 카페에서 커피를 살펴보라. 열대산 원두의 포장지에 앵무새가 날개를 편다. 가구점에서 원목을 두들겨 보라. 보르네오 한가운데에 섰던 나무일지 모른다. 그냥 리모컨을 눌러 보라. 악어와 아나콘다가 아마존에서 씨름판을 벌인다. 그리고 숲을 깊이 들이켜 보라. 지구의 허파에서 내뿜은 산소의 맛을 보라. (62-65쪽)

 

우리는 주위 많은 것들이 시작은 원초적인 자연에서 비롯된 것임을 잊고 산다. 자연에 대해 연구하는 것에 대해 "왜 하느냐"고 묻는다.

실제 생물학과 연구의 대부분은 저자처럼 동물, 식물등 개체를 대상으로 하기보다 생물을 이루는 세포, 그보다 더 내려가 DNA, RNA, 단백질의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저자와 같은 분야를 하는 사람은 아주 아주 드물고 눈길을 받게 마련이라는 얘기다. 필요한 분야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책 저자의 다음과 같은 교감의 순간은 맛볼 기회가 없다.

동물들은 대개 정신없이 자기 일을 하거나, 도망가거나, 무관심하다. 영장류는 쳐다보는 자를 쳐다본다. 대체 넌 뭐 하는 녀석인고? 한심한 듯 묻는 눈초리로 대면하고 응시한다. 노트에는 횟수와 빈도 등의 수치가 기록되지만, 머릿속에는 심상과 기억이 남는다. (113쪽)

 

자기의 연구대상과 눈 맞춤하고 서로의 마음을 읽는 행위란 얼마나 귀한 경험일까.

 

그가 긴팔원숭이 연구를 위해 들어가서 산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열대 우림은 전기도 낡은 물레방아로 돌리는 수력발전기로 겨우 충당하고 오락거리나 장식품, 편의 설비라곤 아무 것도 없는 지역이다.

핸드폰과 인터넷의 디지털 그물망이 쳐지지 않은 녹색 사각지대, 박테리아처럼 번식하는 정보와 고삐 풀린 자기 중계로부터 자유로운 삶의 성소였다. (237쪽)

 

그래서 컴퓨터 화면이 아닌 눈 앞의 세계에 충실할 수 있었다고 한다.

 

빈 방을 물끄러미 둘러보았고, 벽에 붙여 놓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본 책은 또 보고, 바닥에 떨어진 이파리는 주워서 돌리고 쓰다듬었다. 앞마당에 부는 산들바람에 내 다리털이 흔들리는 것을 보다가 눈을 들어 야자나무 잎의 야성적인 움직임에 감탄했다. 끊임없는 벌레의 이민 행렬을 지켜보았고, 음식을 바라보며 식사하였다. 고양이의 기지개를 따라 하고, 물고기가 첨벙거리며 남긴 동심원을 따라갔다. 햇빛이 빨래를 말리는 속도를 목격하고, 달빛으로 동심원을 따라갔다. 햇빛이 빨래를 말리는 속도를 목격하고, 달빛으로 박쥐 날개의 실루엣을 분간했다. 나는 진짜 삶을 살았다. 현실은 충분했다. 증강 현실도, 가상현실도, 강화 현실도 모두 불필요했다. 풍요와 연결 속의 빈곤 대신 제한과 단절 속의 자족을 누렸다. 그리고 나는 붓과 색연필을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의 것이었던 그림을 다시 그리시 시작했다. 그림의 세계에서는 따라가기 어려운 긴팔원숭이와 어깨동무도 가능하지 않은가. (239쪽)

 

실제 저자의 그림 실력은 만화가로서도 모자람이 없는 수준이어서 중간 중간 삽입해놓은 그의 그림은 이 책의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동물을 그린다는 것 (사진찍는 것이 비해)에는 실로 여러 의미가 있다고 했는데, 그냥 보는 것으로 넘어가는 부분들을 깨알같이 짚어 보게끔 해주고, 채집이나 포획 같은 침해적 행위에 대한 멋진 대안이 될 수 있으며, 동물의 행동과 생태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들여다보게 해주는 창문 역할을 하며, 사진처럼 현장을 포착하기 위해 동물을 방해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더 자세히 '관찰'하게 해준다는 것은 그림이 가진 덕목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 돌아온 후 그는 다양한 연구, 집필, 운동, 창작 활동을 하고 있으며 생명 다양성 재단의 사무국장으로 야생 동식물 연구와 보전, 환경 운동과 교욱, 생태 예술 등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생명 다양성 재단'은 침팬지 연구로 유명한 제인 구달, 최재천 교수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고 나도 작년에 회원으로 가입한 상태라서 반가왔다.

저자의 동생 김한민 역시 형 못지 않게 재미있는 사람. 이 사람의 책도 곧 읽지 않고 못배길 것 같은 예감이다.

 

(개인적으로는 '랩걸'보다 더 재미있었다.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와서 하루를 못넘기고 다 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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