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그녀의 글을 처음 대한 것은 소설이 아니라 가벼운 신변잡기였다. 책장은 빨리 넘어가고 부담없이 상쾌하게 읽을 수 있었으나 그녀만의 색깔을 느끼기에 좀 모자란 감이 있었다. 일본의 3대 여류작가라는데, 우리 나라에서도 지명도가 꽤 있는 작가인것 같은데, 어딘가 아쉬운 점, 여전히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어 골라든 책이다. 일본에서는 2002년에 발표된 소설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제일 최근에 출간된 그녀의 소설. 이번엔 소설을 읽어보기로 한다.

일본의 한 사립여자고등학교 한반의 각각 다른 여학생의 얘기가 서로 다른 여섯개의 짧은 소설로 묶여져 있는 형식. 그녀 특유의 표현 방식이 여기 저기서 튀어 나온다.

'나는 늘, 새로 들어온 사람이 좋다. 같은 사람과 오래 사귀는 것보다 청결하고 마음이 놓인다.' (24쪽, <손가락> 기쿠코의 얘기) 새로운 사람과 사귀는 것이 청결하고 마음이 놓인다는 표현에 밑줄을 그었다.

'나는 초록고양이가 되고 싶어, 다시 태어나면. 보라색 눈의 초록 고양이, 라고 말하고 에미는 꿈을 꾸듯 미소지었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도 그 생각만 했다고 한다. 그 고양이는 외톨이로 태어나 열대우림 어딘가에 살고, 죽을 때까지 다른 생물과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아.' (84쪽, <초록고양이> 모에코의 얘기) 초록색 고양이도 시각적으로 확 깨는 듯한데 보라색 눈이라니. 정신적인 병을 앓는 소녀의 머리속을 그 어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효과적이지 않은가. 외톨이로 살고 싶다는 이 소녀는 아마도 극심한 외로움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비 내리는 날의 교실에 들어서면 왜일까, 유치원 생각이 난다. 유치원 다닐 때의 불안한 마음. 아침부터 환하게 켜져 있는 형광등 탓인지도 모르겠다' (105쪽, <천국의 맛> 유즈의 얘기) 비오는 날 축축한 기분으로 등교했을때 아침인데도 환하다 못해 새파란 빛을 내며 온 건물을 밝히고 있던 형광등이 주는 느낌을 이 구절로 인해 오랜만에 되살려 기억해볼 수 있었다.

'졸업하기 얼마 전에 헤어지자고 했더니 기념으로 레오타드(몸에 달라붙는 무용복이란다)를 달라고 해서 소름이 끼쳤다. 남자란 아마도 그 정도의 존재이리라' (107쪽, <천국의 맛> ) 이 소설에 나오는 소녀들은 하나같이 이성에 별로 관심이 없어보인다. 오히려 관심은 동성 친구에게로 더 쏠리는 듯하며, 현실을 약간 방관자의 눈으로 한걸음 떨어져 관망하는 듯 하다. 여고생이라는 단어와 관련된 선입관과 편견을 지우자 생각하며 읽었다.

'엄마는 돈 쓰기를 아주 좋아한다. 엄마에게 돈을 쓰는 것은 일종의 복수라고 생각한다. 행복하지 않으니까.' (115쪽, <천국의 맛>) 겉으로 보기에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 자기 일에 충실한 아버지. 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엄마와 그들을 꿰뚫어 보고 있는 딸이 여기 있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행복과 평화란 얼마나 가당치 않은 것인가. 이런 불일치 상황이 우리를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만든다.

<비, 오이, 녹차> 라는 제목은 또 어떤가. 초록과 싱그러움이 한번에 전달되는 느낌. 시각적 이미지와 연결시켜 표현하는 작가의 능력이 곧 이 작가의 색깔을 만드는 것 같다. 누구와도 구별되는.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마치 새로 단장된 미술관을 둘러 보고 나올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오래된 미술관이 아닌. 그림을 보고 나오니 그동안 내린 비로 땅이 살짝 젖어 있는 것을 볼때의 기분이랄까.

어쨌든 튀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에쿠니 가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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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7-01-23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냉정과 열정 사이>는 읽지 않았어요. 시시하더라는 말씀, 이해가 되요 ^ ^ 뭔가 마음을 확 뺏길 만한 사건이나 인물들이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엔 나오지 않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