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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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과학자이면서 문학적 재능까지 보이는 사람을 본다. 물론 과학을 하는 사람도 그 결과를 내보이는 것은 글을 통해서 이기 때문에 글을 논리적으로 잘 써야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문학적인 글을 말하는 것이다.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과학적 사고 방식과 문학적 사고 방식이 같지는 않다. 엊그제 서양문학 강의 시간에 교수님께서는 "얼음이 녹으면 _________" 이라는 문장을 예로 드시며 빈칸에 들어갈 말로서 "봄이 올 것이다"가 먼저 떠오르는지,"물이 될 것이다"가 떠오르는지 물으셨다. 어느게 맞느냐가 아니라 어느 문구가 먼저 떠오르냐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Hope Jahren 같은 사람은 아마 두가지를 다 떠올리는 사람일 것이다.

우선, 책이 아주 술술 읽혀 굳이 집중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도 끝까지 갈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책 소개를 처음 보았을때 관심이 가면서도 금방 읽고 싶은 마음이 굳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전공은 다르지만 저자처럼 나도 17년 동안, 중간에 아이 낳고서 쉰 3주를 제외하고 랩 생활을 쭈욱 해왔던 경험이 있어서 일 것이다. 저자와 나의 나이 차도 크지 않으니 더욱 그랬을지도.

이런 표현이 뭐하지만 소위 잘 나가는 분야, 즉 돈과 연결이 금방되는 분야라기 보다 그야말로 기초 과학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로서의 고충이 책 전반에 잘 드러나 있다. 미국의 모든 과학자에게 일생동안 제일 해결해야할 문제가 뭐냐고 물어보라, 연구하고 있는 분야의 결론을 찾아내는 문제가 아니라 바로 당장 해결해야할 연구비, 즉 돈이라고 할 거라고 저자는 말한다. 사실이다. 우리 나라 각 연구소나 대학의 연구자들은 더 그렇다. 그러니 그 분야를 정말로 좋아하고, 과학이 직업이라기 보다 생활이고 삶 그 자체로 느껴지는 사람 아니라면 기초과학 분야의 연구는 스트레스의 연속일 수 있다.

현존하는, 또는 현존하지 않지만 화석으로 남아있는 식물에 대한 각종 측정치를 통해 식물 각 종간의 비교 분석, 어떤 차이가 있는지, 어떤 차이가 생존과 절멸의 차이를 낳았는지, 어떤 특정 습성이 어떤 특정 환경에 살아남기 적합하게 한 것인지, 그런 특화된 생장 습성을 만들어온 그 식물의 역사는 어떠했는지, 그야말로 호기심을 느낄 주제는 무궁무진하다. 문제는 이것이 당장 돈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장 수익성으로 연결되지 않는다해도 이런 기초적인 연구 결과가 없이 더 크고 높은 탑을 쌓아올릴 수 있겠는가. 그것이 기초 과학의 역할이고 의미일것이다.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나무를 연구하며 지구생물의 역사를 가늠하고 증명하는 일, 저자가 말했듯이 호기심이 이끌지 않고는 평생 나의 일로 하기 쉽지 않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인간보다 하등할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식물들이 우리 인간들보다 훨씬 독립적이고 때로는 영리하다는 것을 대부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우리가 이용하는 모든 에너지는 직접이든 간접이든 식물이 태양만 있으면 만들어낸 영양분에서 온것이라는 것을. 식물을 독립영양생물이라고 하지 인간을 독립영양생물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을 비롯한 동물은 종속영양생물이다).

저자가 수십년 어려운 조건에서도 연구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나가는데는 과학적 호기심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천 외에 눈에 보이는, 실질적인 동반자가 있었으니 바로 책에 등장하는 빌이라는 동반자이다. 남편이 아니라.

이란성쌍둥이라고 까지 저자가 말하는 그는 대학 시절 만나서 이후의 모든 시간을 저자와 함께 해온 사람이다. 이런 책을 쓰라고 부추긴 사람도 빌이었다고 한다.

과학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는 주제를 이렇게 끈기있는 노력과 정성으로, 최대한 비전문적인 용어를 써가며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자기의 일을 사랑하는 만큼 이런 일도 귀찮아하지 않은 듯 하다. 군데 군데 기가 막힌 비유도 종종 발견했다. 식물은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피하고 싶은 환경 조건을 피해나올 수 없다. 대신 어떻게 대처하여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하는가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 있다 (274쪽). 식물은 우리처럼 공간을 이동하면서 여행하지 않기 때문에 눈 속에서 사는 식물들에게 겨울은 '여행'이라고 비유하면서, 긴 겨울 여행에 대비하기 위해 나무들이 거치는 '경화'과정을 설명하였다. 생존에 필요한 물이 세포 속에서 얼지 않게 하기 위해 식물이 자기 몸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지능과 지혜는 뇌가 있어야만 가능한가? 지능 없이, 생존에 대한 본능만으로 식물이 수천만년을 거쳐 습득해온 방법, 그리고 지능, 호기심, 과학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것을 알아내는 인간. 거기서 과학에 대한 희열이 있고 보람이 있어야 하는데. 읽다보니 어쩔수없이 한탄도 하게 된다. 요즘의 과학 교육은 다 틀렸어 하고.

책의 서문에 있듯이, 더 만져 보고 배우고 이름을 알아갈수록 세상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더 즐겁고 자신감이 자라났다는 헬렌 켈러의 말은 과학자에게도 통한다. 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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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7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8-05-17 18:38   좋아요 0 | URL
그런 선진국에서조차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우리 나라 연구자들의 상황은 더하지요. 결과를 빨리 내야 하고, 예상한 결과여야 하고.
앞으로 기초과학을 하는 인구가 계속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