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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
카롤린 라로슈 지음, 김성희 옮김, 김진희 감수 / 윌컴퍼니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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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원제: Qui Copie Qui?(누가 누구를 베꼈을까;2012;프랑스)

 

모방의 미술사, 그림의 계보

 

 

일단 책의 주제부터 분명히 밝히고 시작하자. 이 책은 제목만 언뜻 보고 짐작할 수 있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미술을 배우는 학생이나 초보 화가들이 예부터 해왔던 수련, 즉 과거 거장의 작품을 베껴 그리는 연습을 통해 색채와 형태의 언어를 눈과 손으로 익히는 행위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 책의 주제는 작품들의 계보를 확인하는 것, 다시 말해 수십 년 혹은 수 세기의 간격을 두고 세상에 나온 작품들 간의 혈연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 카롤린 라로슈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읽은 책이었다. 한 가지 이유는 너무 미술 전시회에 가고 싶은데 통 갈 여유가 없어 오랫동안 욕구불만이 쌓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직업상, 취향상 큐레이션이나 인포그래픽에 늘 관심이 많아 구성과 기획이 좋은 책을 꾸준히 찾아 읽기 때문이다. 두 이유 모두에서 기대한 것 이상의 만족감을 준 책이었다. 매월 쏟아지는 미술 신간과 이미 어느 정도 인정받은 미술 구간이 상당한 상태에서 이 책을 고른 것엔 분량이 많지 않다는 점이 한 몫하였다. 300쪽도 안 되니까, 나오는 그림 수가 200여점 정도니까 하고 만만히 덤볐다가 제대로 한 방 먹은 책이다.

 

다 읽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45개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읽는 내내 저자의 지식 내공에 감탄하였다. 이 책이 다루는 시대는 르네상스부터 현재까지이다. 전공자든 아니든 미술서적을 읽거나 전시회를 갔다가 어디선가 본 그림인 것 같은데 긴가민가한 경험이 한번쯤 있었을 것이다. 심증은 있었으나 물증은 없어 답답한 이들에게는 속 시원한 정답지가 되는 책이다. 보통 미술의 계보를 따질 땐 동시대 사제지간을 주로 말하는데 이 책은 세기를 넘나드는 화가들의 모방(참조)을 보여 주는 책이라 무척 인상 깊었다. 모방이라는 개념으로 미술사를 다시 읽는 경험을 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강력 추천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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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지음, 변광배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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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La Préparation du roman, I, II : Cource et Séminaires au Collège de France(1978-1979 et 1979-1980) - 2003 출간

 

 

롤랑 바르트 지성의 종착지를 가늠하다

 

 

 

문학 이론가, 구조주의자, 탈구조주의자, 기호학자, 문화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20세기를 흔든 대표적인 지식인이라는 점에 이견을 제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워낙 많은 영역에서 활동했던 학자였던 만큼 문학과 철학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인문사회계열 전공자라면, 살면서 롤랑 바르트의 책은 한 권도 완독한 적이 없어도, 그를 레포트나 시험 답안에 한번쯤은 인용해봤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애도일기>를 거의 2년에 걸쳐 썼을 만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애도일기>를 발표한 지 1년 후에, 자전 에세이집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를 발표한 지 5년 후에 자신이 죽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다. 아주 건강했고, 새 학교에 취임한 지도 몇 년 되지 않았다. 1980년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롤랑 바르트가 자신의 죽음을 감지하고 준비한 것은 이 사고 이후 한 달 남짓의 시간 동안이었다. 그의 죽음은 한창 자살(선택적 죽음)인가 아닌가로 회자되었다. 부상 정도는 심해도 충분히 회복 가능한 상태였는데 치료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성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사람, 롤랑 바르트다운 죽음이었다.

 

 

쇠이유 출판사는 강의강연세미나만을 책으로 만드는 에크리트 총서를 펴내고 있다. 이 책 역시 그 총서 중 하나이다. 롤랑 바르트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 부임하여 소설의 준비La Préparation du roman’라는 제목으로 두 차례 강의를 진행하였다. 각 강의는 일주일에 한번씩 14개월(13), 23개월(11) 동안 진행하였으며 두 강의 각각에 연계된 하나의 세미나가 있었다. 1부 세미나는 양분해 1부 첫강과 종강 시간에 했는데 2부 세미나는 2부 전체 강의를 마친 후 진행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2부 마지막 강의를 끝나던 날 교통사고가 났고, 세미나는 진행되지 않은 채 롤랑 바르트는 사망하였다.

 

롤랑 바르트 사후 20년이 훨씬 지나서야 소설의 준비와 세미나 내용이 동명의 책으로 나올 수 있었다. 2003년 문헌전문가 겸 전시 기획자이면서 소설가이기도 한 나탈리 레제의 감수 하에 강의노트와 녹취록이 정리되었다. 그 책을 번역한 책이 올 2월 민음사에서 나온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책 속에 이 책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서술이 있는데 35년여 전 녹음 파일을 온전히 보관하고 있었으며, 판권을 산 민음사에 책 본문과 원본 문서 뿐 아니라 육성 녹음 파일까지 모두 공유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무려 700여 쪽에 달하는 책. 두께는 애교고 까놓고 얘기해서 그럭저럭 읽기 정말 어려운 책이다. 물론 책은 방대한 미주를 실으며 독자의 이해를 최대한 돕고자 하지만, 롤랑 바르트를 대략적으로 파악하지 않은 독자들은 고전할 수밖에 없는 책이다. 푼크툼 등 롤랑 바르트가 즐겨 쓰거나 주창한 몇 가지 개념만 안다고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언어적 감각과 소양도 적어도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등 인도유럽어족 전반에 대한 조예가 있어야 쉽게 읽히고, 문학 이론적 부분은 롤랑 바르트가 죽기 직전 일본 문학에까지 심취했기 때문에 동서양 문학 소양을 모두 갖춰야 한다. ‘탄생 100주년이라는 좋은 핑계거리가 없었고 작정하고 기간을 정해놓고 읽지 않았다면 과연 이 책을 읽었을까.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의 시작과 끝은 프루스트다. 롤랑 바르트는 그를 설명하고 그와 자신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구분하면서 글쓰기-의지를 강조하는 자신의 쓰기론을 논한다. 롤랑 바르트 쓰기론의 다른 한 축은 하이쿠이다. 롤랑 바르트는 하이쿠의 강점에서 문학의 미래와 적성에 맞는 문학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요컨대 당시 롤랑 바르트가 다다른 지점은 기억(과거)의 글쓰기가 아닌 순간(현재)의 글쓰기, 저자의 귀환(작품에 저자를 투영), 자동사형 쓰다 동사의 패기(반드시 목적이 있는 글쓰기)이다.

 

 

롤랑 바르트 지성의 종착지는 어디였을까. 결국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를 읽는 이유, 읽으며 가늠하고 싶은 바는 이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고 여전히 다이포라나 사토리 같이 평소에 그가 좋아하던 개념을 가지고 가지만 조금 더 발전한 문학관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가 수많은 분야를 천착하다 도달한 종착지는 문학이었을까란 생각을 하게 했던 책이었다. 긴 독서 끝에 책 마지막 장을 덮으며 몇 달 전 창비 공모전 시상식에서 한 편집자가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인간의 마지막 직업은 작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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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인문학
김욱동 지음 / 소명출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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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인문학]

호모 디지투스는 호모 사피엔스를 품는다

 

 

앤드루 솔로몬은 평생 난독증을 앓고 있다. 그럼에도 예일대와 케임브리지대에 진학하고 케임브리지대에선 심리학 박사 과정 까지 밟고 있다. 1,000쪽이 넘는 책을 써 각종 도서상을 휩쓸었다. 내가 그를 보며 얼마나 많은 힘을 얻었는지 모른다. 나 역시 20대 후반에 원인 불명의 난독증으로 인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내가 쓴 글의 오탈자를 알아채긴 커녕 능동과 피동을 구분하지 못하고 어순이 뒤바뀌고 문장이 뒤엉켜 보이는 증상을 겪기 시작하면서 나는 공부를 완전히 포기해 버렸다.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이었다. 뇌에는 아무 하자가 없다는데, 정신병자로 몰리면 어쩌나 그래서 취업할 수 없으면 어쩌나 하며 외울 수 있는 모든 건 외웠다. 1년이 꼬박 걸려 지금은 스스로도 별 이상을 못 느낄 만큼 예전으로 돌아왔다. 대신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읽고 쓰고, 강박적으로 활자를 대하는 버릇이 남았다. 그래서 독해가 예전보다 더 정교해진 것 같다가도, 책을 읽는 속도는 여전히 대중없이 들쭉날쭉하다. 최대한 스트레스 안 받고 생각을 안 하고 살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앤드루 솔로몬이나 내가 앓고 있는 난독증이 본인에겐 심각한 문제인데 남들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토익 등 각종 시험을 잘 못 보는 이유를 아무리 얘기해도, 노력 안한 것을 핑계 댄다고 생각하지 믿지를 않는다. 편집자보다 책 속 오탈자를 더 잘 찾고, 지인들이 SNS나 메신저에서 오독하는 것을 바로잡아주기 때문이다. 그만큼 디지털 난독이 흔한 시대인 것이다. 졸지에 앤드루 솔로몬이나 나 같은 이들은 별 것도 아닌 것에 호들갑을 떠는 완전 정상인이 되어 버렸다. 1970년대 말 미국의 철학자 월터 카우프만은 20세기의 대학 교육이 쓸데없이 많은 인문학 전공자를 배출하였고 인문학이 위기를 맞았다면서 교육법을 바꾸고 인문학 스스로 혁신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도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성토는 계속되고 있다. 다만 예전과 달리 지금의 인문학 담론은 디지털 시대를 의식하며 형성되고 있다.

 

소설 <폼페이>(2003)를 매일 저녁 30쪽씩 읽게 하고 그 이튿날 아침 역시 뇌 자기 공명영상으로 측정해 보았다. 소설을 읽은 뒤에도 닷새 동안 매일 아침 같은 방법으로 뇌를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소설을 읽은 이튿날 아침에는 언어의 감수성을 관장하는 뇌 부위인 좌측두엽의 신경회로가 활성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 p.69

앨빈 토플러는 <미래 충격>(1970)에서 이러한 정보 과잉이나 폭주 현상을 신체 비만에 빗대어 정보 비만(infobesity)’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정보를 뜻하는 인포와 비만을 뜻하는 오비시티를 한데 합쳐 만든 신조어다. 물론 토플러는 이 용어를 지나치게 정보가 폭주하는 현상을 비유적으로 일컫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정보 비만이라는 용어는 은유적 표현 못지않게 글자 그대로 축어적으로 받아들여도 크게 무리가 없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최근 들어 디지털 기기를 지나치게 사용하는 나머지 과체중이 되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 p.84

학자들이 다른 학자들의 논문을 인용하는 방법은 예전과 눈에 띄게 달라졌다. 즉 옛날의 논문들은 좀처럼 인용하지 않고 최근 논문들만 인용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보 이용은 편리해진 반면 연구의 폭은 전보다 훨씬 좁아졌다. 정보의 양이 아무리 많고 이용하기가 아무리 편리해졌어도 정보의 질이 오히려 옛날보다도 못하다면 개선이 아니라 오히려 개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학자들한테서만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디지털 매체를 사용하여 텍스트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하면서 구어와 문어의 질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언어의 질이 떨어졌을 뿐더러 적잖이 오염되기도 하였다. - p.85

국내 영미문학 번역의 대표적인 권위자인 김욱동 박사가 올 1월 신간을 냈다. 그런데 지금까지 냈던 문학 이론서나 영문학 및 번역과 관련한 책이 아니라 인문학 전반에 대한 고민을 담은 일반 인문서의 형태이다. 제목은 <디지털 시대의 인문학>이다. 지금껏 50여 권이 넘는 책을 내왔으나 이 책만큼 절박한 심정으로 원고를 쓴 적이 없다(p.5)고 책머리에 밝히고 있는 책이다. 오죽하면 펜을 잡았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 대학 강단에서 내려온 지 꽤 된 노학자였다. 가르치는 일과 멀어진 이였다. 일부러 쓰지 않아도 되는 책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학자로서의 양심과 소명의식을, 저자의 통렬한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디지털 시대의 인문학>은 각종 인문학 강좌에서 발표했던 글을 모아 한 몸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흔히 모음 글 형태로 내는 일반적인 단행본화한 강의 책과는 다른 책이다.

 

그리고 책 자체가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를 실험하고 있다. 200쪽도 채 안 되는 분량에 의식적으로 이미지를 많이 넣고, 문장이 평이하다. 또 온갖 정보의 인용과 큐레이션으로 점철된 백과사전식 혹은 자기계발서형 구성을 취하고 있다. 11장으로 구성된 <디지털 시대의 인문학>은 디지털 시대와 인문학의 현황을 6장에 걸쳐서, 디지털 시대의 인문학이 나아갈 길에 대한 논의를 4장에 걸쳐서 다룬 다음 마지막 장에서 정리 및 결론을 내리며 끝낸다. 유일무이하고 새롭다는 느낌은 주지는 않지만 우리 사회에 우리 언어로 다룰 필요는 충분하였던 책이었다. 인류의 언어는 음성 언어 중심에서 문자 언어 중심으로 진화하였다. 디지털 시대 도래 이전의 활자와 책 자체가 인류 정신의 총체였고 지식 권력의 원천이었다. 그 헤게모니를 디지털 시대가 완전히 무너뜨렸다.

더 많은 아이를 접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내면화하여 풍성한 이해력과 공감하는 능력을 지니게 된 아이가 책을 잘 읽는 아이가 될 수 있다. - p.94

매체가 곧 메시지라는 매클루언의 주장은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30대 말부터 시력이 점차 나빠지기 시작한 니체는 더 이상 종이 위에 펜으로 글을 쓰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1882년 그는 마침내 몇 해 전 한스 말링-한센이 발명한 타자기를 구입하였다. 두 눈을 감고도 니체는 이제 타자기로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문체가 예전과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데 있다. 니체의 산문이 전보문처럼 짧고 경구적인 데다 좀 더 탄탄하게 되었다. - p.103

거의 무한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엄청난 디지털 정보를 흔히 바다에 빗대고 있지만, 이렇다 할 경험이 없는 인터넷 이용자들은 정보의 바다에서 유익한 정보를 낚기보다는 그 바다에서 익사할 가능성이 무척 크다. 그러나 막상 지혜나 지식에 대해서는 사막을 여행하는 목마른 사람처럼 여전히 갈증을 느낀다. 정보를 빠르게 전달한다는 정보 고속도로도 이런저런 이유로 교통이 막히기 일쑤다. 이렇게 양만 많을 뿐 이용 가치가 별로 없는 정보를 두고 흔히 인포-가비지(infogarbage)’라고 부르는 사람들마저 있다. 산업 쓰레기나 폐기물이 지구 생태계를 망가뜨리듯이 이러한 정보 쓰레기도 인간의 정신 세계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 p.105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인텔리겐치아의 태도는 현재 둘로 나누어져 있다. 한 가지 태도는 과거의 부르주아지 지식 권력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은 디지털 시대에서 희망을 본다. 새로운 시장을, 더욱 용이해진 대중 선동의 가능성을 본다. 대중들은 계속 모르고 문제의식이 없어야 한다. 대중들이 정보의 홍수에 멀미를 느끼고, 생각하기를 싫어할수록 인포그래픽과 큐레이션은 독점되고 인텔리겐치아의 고용 창출이 이루어진다. 그저 인문학이 위기고 여러분은 바보라고 할 뿐 해법을 알리는 데는 소극적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 태도는 기꺼이 대중을 가르치고 그들과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려는 것이다. 대중을 동시대를 사는 동반자로 어깨를 나란히 하려 한다. 모두가 최악의 길을 피할 수만 있다면 선교사 같은 투신도 마다하지 않는다. 김욱동과 이 책은 후자의 태세를 취하고 있다.

보통 대학 내 인문학의 위기를 논할 때 구조조정에 열을 올리는 대학이나, 예전 같지 않은 대학생들을 주로 언급하는데 저자는 인문학자들 자체를 서슴지 않고 맹렬히 비판한다. 전세계 논문의 디지털 DB구축이 이루어진 이후 전자화된 최근 논문 위주로 인용하는 연구 풍토가 형성되었는데, 과거의 지식 유산을 찾아보지 않는 이런 분위기가 과연 옳은 태도냐고 묻는다. 신조어 쓰는 재미에 빠져 언어 파괴와 축소에 기여하고 있는 대중도 문제지만, 그걸 방관하고 편승하고 부추기는 지식인 스스로도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디지털 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도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인문학의 건강한 미래에 있어 모두가 취할 수 있는 해법이 있다고 강하게 확신한다. 그렇기에 무기력하고 비관론에 빠진 사람은 꾸짖고 함께 힘을 내자고 독려한다.

 

디지털 시대에 피상적인 독서는 가능하지만 심오한 독서를 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 전통적인 독서 방법이 바로 심오한 독서. 버커츠는 진리나 의미, 인간의 본성과 삶의 과정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깊이 생각하고 성찰하는 이러한 독서 방법밖에는 없다고 지적한다. (...) (심오한 독서는) 책 한권을 천천히 명상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는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근처에서 삶에 대해 꿈을 꾼다. - p.108

인문학의 영혼은 바로 활자 매체와 책 그리고 도서관이다. - p.200

활자 매체와 책이 사라지면 인터넷도 사라진다. 이 두 가지는 상호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를 돈을 주고 사고판다는 정보화 시대, 아날로그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디지털 왕국을 세운 디지털 시대에 인문학은 옛날의 인문학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이점에서 인문학도 집을 나간 탕아와 같다.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좌절과 절망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탕아처럼 인문학도 디지털 세계에서 온갖 희열과 희망, 좌절과 절망을 겪은 뒤 다시 아날로그 세계로 돌아올 것이다. 만약 인문학이 디지털 문화와 손을 잡는다면, 그래서 참다운 의미에서 창조적으로 통섭을 이루어낼 수만 있다면 21세기에 학문의 왕자로 거듭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 p.201

생각이 다른 독자도 있을 수 있지만 <디지털 시대의 인문학>의 담론에서 또 다른 위로 혹은 힐링을 엿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디지털 바보론은 화살이 개인에게 겨누어져 있다. 이렇게 훌륭한 기술을 똑바로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바보를 자처하다니 유감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인문학>은 바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려준다. 매체가 달라지면 사유가 달라지고, (인간발달과정에 있어) 독서 발달이란 개념을 망각해 버렸고, 학습과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정보 선별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매일 아주 조금씩이라도 무언가를 읽어도 뇌가 상당히 활성화된다. 디지털 치매와 난독은 개인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지만, 그것의 발생 이유가 개인의 탓만은 아니라는 것이 이 책이 독자에게 선사하는 따스한 위안이다. 저자는 디지털 문화의 위험성을 알리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하였다. 그리고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을 대하는 자세는 누구보다 애틋하고 사려 깊다. 마음씨 좋은데 똑똑한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책이었달까.

저자의 결론은 오늘날 정보화 사회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디지투스로 진화해야 한다.(p.199)”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비판적 사고, 창의적 사고, 통합적 사고, 통섭이다. 그런데 이것은 새로운 기치가 아니라, 문자 시대의 인문학에도 존재했던 인문학의 본질적 기능이다. 활자(아날로그)와 디지털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 그래서 그는 종이책이 전자책으로 완전히 바뀔 수 없으며 그래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다만, 예민한 성인 독자의 경우 학술 출판 전문 소명출판사의 책이고 대학 교수였던 저자의 책이기에 기대하고 들었다가 약간 당황할 수 있다. 문장이나 내용 자체도 굉장히 쉬울 뿐더러, 청소년서에서 많이 쓰는 편집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청소년서 같은 일반교양서의 모양새를 취하는 까닭은, 저자의 최근 관심사가 청소년 교육이기도 하고, 청소년을 주 타깃 삼아 쓴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고 책을 읽을지 말지 선택하길 바란다. 청소년 혹은 책을 잘 안 읽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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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연대기 -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시간의 모든 것
애덤 프랭크 지음, 고은주 옮김 / 에이도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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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About Time ; Cosmology and Culture at the Twilight of the Big Bang(2011;미국)

 

인문학의 감성 더한 물리학의 시간

    

인간의 시간을 최근 새롭게 이해하게 된 우주의 시간과 연관시켜 설명함으로써, 우리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어떤 다른 시간을 창조할 수 있는지를 더 잘 알 수 있다.

- 애덤 프랑크, 저자 서문

 

석 달째 매월 1일이 되면 전달 출간한 인문, 사회, 과학, 예술 신간을 모조리 검토하고 있다. 중복 포함해서 1,000권에서 1,200권 정도를 보는데 최소한 3시간에서 5시간 정도는 투자한다. 분석 글을 쓰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걸린다. 그보다 빨리 훑으면 얻는 것도 없고 책과 출판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평소에도 틈틈이 신간 정보를 검색하고 괜찮은 신간들을 제목을 기억해두거나 얼른 구해 읽어보긴 하지만 신간 목록 전체를 보면 또 느낌이 다르다. 그 달의 흐름도 보이고, 그 달 출판 관련 뉴스와 잡지들이 쏟아냈던 기사들이 한 번에 정리된다. 석 달을 하니 습관 같이 느껴진다. 목록을 보면 책도 책이지만 이달에 새로 생긴 출판사도 발견하고 눈이 가는 심상치 않은 출판사도 발견하게 된다. 에이도스가 그 중 하나였다. ‘신선한 주제, 단단한 편집과 디자인, 아름다운 과학책을 표방하는 출판사. 2011년에 창립해 이제 17권의 책을 냈지만, 버릴 책 하나가 없이 괜찮은 책들만 내고 있다. 최근엔 기획회의나 언론에서 ‘8대 루키출판사로 꼽으며 주목하고 있다.

 

 

<시간 연대기>는 에이도스가 출간한 열여섯 번째 책이다. 1월 말 출간되었고, 미국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애덤 프랭크가 2011년에 낸 About time을 번역한 책이다. 각주 포함 500쪽이 넘어가는 두툼한 책,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시간의 모든 것이라고 에이도스가 붙인 부제가 무척 인상 깊어 예사롭지 않은 두께임에도 솔깃해하며 읽기 시작하였다. 이공계열 전공자들에게 철학이 그렇게 느껴질까, 물리학은 접할 때마다 놀라웠다. 이 한 학문 안에 우주가 있고 만물의 원리가 있었다. 공학에서도 수학에서도 물리학이 있었다. 흔히 만학의 근간을 철학이라고 하는데, 철학과 가장 가까운 학문을 꼽으라면 단연 물리학이 아닐까 싶다. 분량이 상당한 만큼 학문적으로 깊이 들어가 비전공자, 특히 비이공계 독자들에게 어렵지 않을까 생각하고 책을 폈는데 웬걸, 아무리 책장을 넘겨도 과학서보다 인문서로 느껴졌다. 물리학의 시간에 관한 책이긴 한데 인문학의 감성이 더해져 있는 책이었다.

 

 

저자는 인간의 시간은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며, 시간의 역사는 곧 물리학과 천문학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이 책은 현대 물리학 일반교양서라기보다는 천체물리학 교양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주제는 천체물리학이되 문화사처럼 서술해놓았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이다. 저자는 문화를 인간과 우주의 연결고리로 보기 때문이다. 인간이 겪은 모든 시간의 역사를 다룬 책이기에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시간의 범위는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다. 신화적이고 비과학적인 시간이 고대 철학을 거쳐 SF를 방불케 하는 현대 물리학의 치열한 쟁점을 입고 있는 현재의 과학적인 시간까지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그러면서 계속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시간에 대한 인간의 접근이 달라져왔듯이 지금 우리의 생각은 타당한지, 시간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지 말이다. 그래서 책 내용이 여러 관점에서 읽어도 흥미롭고 천체물리학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어도 읽는 데 별 문제가 없었던 책이었다. 일독은 끝났지만 한 동안 사로잡혀 있을 것 같다. 아직은 책장을 덮고 싶지 않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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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5-03-30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연대기도 에이도스였군요. 전 새의 감각 을 읽었는데 에이도스였어요. 두 책 모두 눈여겨본 책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출판사가 같네요.
 
[한자의 탄생]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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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文字的故事(문자적 고사;2001;대만)

 

한자를 노닐다

 

 

 

구체적인 사물을 모양을 본떠서 만든 글자 상형자, 추상적인 생각이나 뜻을 점이나 선으로 나타낸 글자 지사자, 한자와 한자를 합쳐 새로운 뜻을 나타내는 글자 회의자, 뜻을 나타내는 한자와 음을 나타내는 한자를 합쳐서 일부는 뜻을 일부는 음을 나타내는 글자 형성자. 한자나 한문을 배울 때 한자의 짜임을 배운다. 한자문화권 국가인 우리나라는 점점 한자어의 비중이 줄어들어간다고는 하지만 전체 국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점점 한자교육이 줄어든다고는 하지만 한자 자격증 응시자도 꾸준하고, 어릴 적부터 한자 교육을 접할 기회가 많다.

 

 

문자가 생겨남으로써 인류의 사유와 표현은 시간의 독재에서 벗어나 순간적으로 공기 속으로 흩어지지 않으면서 축적되기 시작하고, 점차 두께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문자는 공간적 거리와 시간적 거리를 포함하는 언어 연계의 확장력을 크게 증가시켰고, 인간의 영감, 발견과 발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인간의 사유를 지속시켜주는 중요한 근원으로서의) 곤혹감을 더 이상 고독하지 않고 안정적이며 지속적이고 면밀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 p.21

 

공동의 기억이 크고 두터워질수록 문자가 부담해야 하는 정보의 양은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문자를 더 경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 p.79

 

오래된 문자들 위에 남아 있는 모든 못자국과 홈, 호도 등은 이 문자들의 유구한 역사와 사라지지 않는 경력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 p.123

 

 

책 제목과 출판사 홍보 글을 봤을 때는 갑골문자에서 현재 한자에 이르는 한자의 탄생과 역사를 논하는 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그런 내용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상한 모양새와 전혀 다른 책이었다. 어떻게 보면 한자를 소재로 저자의 인문학적 내공을 여실히 드러낸 전 방위적 인문서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역사책이라고 하기엔 언어학 책에 가깝지만 특정 학문 교양서 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 묘한 책이다. 보르헤스, 마르케스, 롤랑바르트, 벤야민이 한자와 도대체 뭔 관련이 있는지 궁금하다면 책을 펼쳐보시길. 한자를 예상치 못한 대상들과 엮으며 논하는 걸 보고 읽는 내내 감탄하였다.

 

 

갑골문에서 보면 자는 처음에는 음식의 종류가 아니라 혹형의 일종이다. 형태를 살펴보면 큰 절구 안에 놓여 있는 것이 음식이 아니라 절망적인 표정을 한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윗부분은 두 손으로 절굿공이를 잡고 있는 회자수로서 산 채로 사람을 내리쳐 육장으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사방으로 피가 튀고 있다. - p.211

 

말이나 돼지, 토끼, 코끼리, 호랑이, 코뿔소 등은 어째서 하나같이 서 있는 것일까? 해담은 너무도 시시하다. 쉬진슝 선생이 내린 해답은 글쓰기 도구의 제약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갑골문의 주요 글쓰기 도구는 이후에도 계속 사용된 죽간으로 붓에 먹물을 묻혀 그 위에 글씨를 썼다. 중국의 동물들은 죽간의 좁고 긴 형태의 제약 때문에 늘 환상적인 진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 p.245

 

문자는 완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문자를 만들려는 야망조차 갖지 않는 것이 좋다는 깨달음이다. 실질적이지 못한 부담이 문자를 긴장시키고, 보수적이게 하며, 가능성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안전하고 배타적인 길로만 가게 하기 때문이다. 가능성이야말로 문자가 우리의 사유에 가져다주는 가장 훌륭한 선물이자 은혜다. - p.331

 

 

<한자의 탄생>에 혹했던 이유는 탕누어라는 저자의 책 자체가 초역일뿐더러, 상대적으로 자주 접하지 않는 대만 저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역자의 말에 탕누어의 책은 번역하기 힘들다는 얘기가 나오는 걸 보고 호기심이 증폭하였다. 탕누어는 대만 최고의 문화비평가로 자칭 직업 독자(professional reader)’이다. 학부 전공은 역사학이지만 온갖 분야를 넘나들며 인문학 콘텐츠를 생산한다고 한다. 그래서 <한자의 탄생>엔 한자와 한문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 같은 것은 없다. 그와 관련한 기본적인 지식은 있다는 전제 하에 동서양을 넘나들고 언어 일반을 논하고 여러 학문을 논하며 한자를 이야기한다. 책 내내 한자는 장난감이다. 한자를 노닐고 한자가 노니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읽어보시길. 현란한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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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5-03-30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참 흥미롭게 읽었어요. 저자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골수 팬이라 백년동안의 고독 을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는..

이섬 2015-03-30 05:35   좋아요 0 | URL
마르케스 뿐 아니라....어우 소재만 한자인 책이었습니다.
어찌나 현란하게 다양한 대상과 엮어 한자를 논하던지.
저도 이거 나왔을 때부터 읽는다 읽는다 벼른 책인데, 저는 한자의 탄생과 역사와 관련한 책을 보고 읽었거든요. 전혀 예상 밖의 책이었음.
작가 내공이 장난이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이 어느 정도 있는 독자에게 재밌지 좀 어려운 감이 있는 책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