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2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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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 셜로키언이 뤼팽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

 


 

1886, 한 젊은 영국인 의사가 생활고 때문에 연재하게 된 탐정소설 셜록 홈즈 시리즈가 초대박이 났다. 옆 나라 프랑스에도 곧 번역되어 큰 인기를 누렸지만 프랑스인 독자들은 셜록 홈즈 시리즈를 즐겁게 읽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우리 프랑스에는 내로라 할 만한 이런 소설이 없을까 하며 씁쓸해 한다. 항상 옆 나라를 의식했던 프랑스지만 대영제국도, 셜록 홈즈도, 그리니치 본초자오선도 죄다 못마땅했다. 의욕적인 잡지 편집장 피에르 라피트는 프랑스의 코난 도일을 만들고자 적당한 작가를 찾다가 모리스 르블랑을 발굴하였다. 그렇게 아르센 뤼팽 시리즈가 시작되었고, 몇 편의 단편소설 연재가 끝나자 모리스 르블랑은 대놓고 셜록 홈즈를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 셜록 홈즈와 왓슨을 등장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코난 도일은 자신의 캐릭터를 쓰고자하는 모리스 르블랑의 요청을 거절한다. 그래서 모리스 르블랑은 이름을 교묘하게 바꿔 에헐록 쇼메즈(헐록 숌즈)’윌슨이 등장하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들을 내놓았다.

 

문제는 모리스 르블랑이 셜록 홈즈 시리즈에 대한 조예가 별로 깊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르센 뤼팽 시리즈를 시작할 때 그는 코난 도일이 누군지도 몰랐다. 그리고 재능 있는 작가였지만 코난 도일과 글 스타일이 정반대였고, 애초부터 셜록 홈즈를 희화화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아르센 뤼팽에서 숌즈는 외모 상으로는 셜록 홈즈지만 셜록 홈즈와 많이 다르다. 그래서 <기암성>까지 발표가 되었을 때 코난 도일은 강하게 불쾌함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셜로키언들이 뤼팽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아르센 뤼팽 시리즈 두 번째 책으로 뤼팽과 숌즈가 대결한 두 가지 사건을 다룬 <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는 자신이 셜로키언인지 아닌지 테스트할 수 있는 지표가 되는 책이기도 한다. 전편인 <괴도 신사 아르센 뤼팽>의 마지막 단편 헐록 숌즈, 한발 늦다에 이어 이 책까지 별 거부감 없이 즐겁게 읽었다면 전체 아르센 뤼팽 시리즈를 읽고 뤼팽의 매력에 빠지는 데 아무 지장이 없을 것이다.

 

<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에는 금발 여인이라는 장편소설과 유대식 등잔이라는 중편소설 두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단행본 상으로는 첫 번째 사건, 두 번째 사건해서 마치 장편 소설 하나인 것처럼 해놓았고 내용적인 연결도 어느 정도 있지만 공백을 두고 따로 연재했던 별개의 작품이다. 금발 여인은 사사건의 핵심까지 다가가는 데까지의 전개가 무척 재밌는 작품이다. 수학교사 제르부아는 딸 쉬잔에게 생일 선물로 주기 위해 중고 마호가니 책상을 사는데 한 젊은이가 자신에게 되팔라고 하는 것을 거절한다. 그런데 다음 날 책상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본격적인 불행은 두 달 후 제르부아는 복권에 당첨되는데 그 복권이 도둑맞은 책상 속에 있어 당첨금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책상을 다시 사려 했던 젊은이가 뤼팽이었고 뤼팽이 이 책상을 훔쳐서 복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뤼팽은 쉬잔을 납치해 당첨금을 50만 프랑씩 나누자고 협박하고, 쉬잔 때문에 당첨금 절반을 뺐긴 제르부아는 이를 간다.

 

한편 도트렉 남작을 죽이고 그가 갖고 있던 푸른 다이아몬드가 도난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푸른 다이아몬드는 경매에 붙여져 크로종 백작 소유가 되는데 크로종 백작 역시 도난을 당한다. 두 사건에는 모두 뤼팽의 한 패인 금발 여인이 있었다. 복권 사건에서 쉬잔을 납치했고 뤼팽과 함께 사라졌던 여인이 푸른 다이아몬드를 훔치고 살인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래서 크로종 백작 부부와 도트렉 남작의 상속자, 제르부아는 뤼팽을 잡기 위해 가니마르 형사 외에 숌즈와 윌슨을 부른다. 이미 전작에서도 모리스 르블랑은 뤼팽과 여성 캐릭터들을 잘 엮는 편이었지만 이 장편을 통해 뤼팽 시리즈 전개에 있어 뤼팽의 여인들역시 주요한 코드임을 분명히 한다. 유대식 등잔에서는 금발 여인 사건 후로 별다른 사건 의뢰가 없어 심심해하던 숌즈와 윌슨이 도둑맞은 유대식 등잔과 그 안에 든 보석을 찾아달라는 앵블방 남작의 의뢰와 이 사건에 개입하지 말라는 뤼팽의 경고장을 동시에 받고 다시 프랑스로 오면서 뤼팽과 대결한다. 그리고 뤼팽 때문이라기보다는 한 여자의 의리 때문에 어이 없이 숌즈가 당한다.

 

뤼팽 씨, 무슨 일을 한다 해도 놀라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두 명 있습니다. 한 명은 나고, 다른 한 명은 당신입니다.”

이들 사이에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숌즈는 아르센 뤼팽을 체포하지 못했다. 숌즈에게 위팽은 체포를 포기해야 할 만큼 어려운 적수였으며 맞붙는 과정에서 번번이 뤼팽에게 우위를 내놓았다. 하지만 이 영국 탐정은 끈질긴 집념으로 결국 유대식 등잔을 찾아냈다. 푸른 다이아몬드를 찾아냈던 일과 마찬가지로 이번 사건에서 숌즈의 공적은 덜 빛났다. 유대식 등잔을 되찾은 정황도 그렇고 범인의 이름도 모른다고 발표해야 했으므로 대중이 보기에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사나이 대 사나이, 뤼팽 대 숌즈, 도적 대 탐정으로서 볼 때 이 대결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막상막하의 싸움이었다. 두 사람 모두 승리자인 셈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무기를 내려놓은 채 서로의 정당한 가치를 알아보는 맞수로서 점잖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p.297

 

코난 도일은 자신의 캐릭터가 다른 작가의 소설에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에 기분 나빠 했지만, 모리스 르블랑은 다른 작가의 캐릭터를 자기 작품에 쓰면서 어쨌든 뤼팽과 숌즈는 서로 인정했다고 하면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자 하였다. 단행본으로 출간되며 원래 연재분에 없던 에필로그가 추가되었다고 하는 게 이 부분을 말하는 것 같다. 제목은 <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인데 의외로 여인들의 활약에 더 눈이 갔던 책이었다. 문득 코난 도일과 모리스 르블랑이 사이좋게 교류하며 함께 글을 쓰면 어땠을까 상상해 봤다. 서로에게 없는 면을 채우고 서로의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 완벽한 꽤 재밌는 책이 나왔을 것 같은데 조금 아쉬웠다. 더 아쉬운 것은 아르센 뤼팽 전집에서 숌즈의 등장은 세 번째 책인 <기암성>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총 장편 16, 중단편 37, 희곡 4편으로 총 20권으로 구성된 아르센 뤼팽 시리즈 전체세서 숌즈의 존재감은 대단하다. 숌즈 때문에 뤼팽이 나타난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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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1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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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아홉 단편으로 나타난 사내

 

 

 

어째서 한 가지 외모로만 살아야 하나? 매번 똑같은 인물로 살아가는 위험을 왜 감수해야 하나? 행동만으로도 충분히 나를 분간해낼 수 있는데 말이네. 아무도 이 사람이 바로 아르센 뤼팽이다라고 단언하지 못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네. 중요한 건 누구나 아르센 뤼팽이 이런 일을 했다라고 확신한다는 것이지. - 아르센 뤼팽(p.28)



2010년과 2011년만 해도 조용해 별 주목을 못 받다가 2012년 출판계를 뒤흔든 문제아가 있다. 미르북컴퍼니의 더클래식 시리즈이다. 저작권에서 자유로운 유명 작품을 엄청 빠른 속도와 싼 가격으로 번역본을 내놓았다. 일본 책이든 독일 책이든 영미 책이든 모두 영문판을 붙여 어학 학습서(실용서)로 판매함으로써 개정 전 도서정가제에서도 출간과 동시에 마음대로 할인이 가능했고 개정 후 도서정가제에서도 재정가가 가능한 18개월 이상 구간은 재정가를 통해 예전 같은 파격가로 판매하고 있다. 전자책은 더욱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팔았다. 빠른 번역과 낮은 가격 때문에 좋은 번역가를 구하기 쉽지 않아 엉망인 번역본들이 속출했지만, 출판사는 일단 책부터 빨리 내놓고 박리다매로 얻은 수익을 얻은 후 수정쇄를 만들고 다른 책의 번역 질을 높이는 전략을 고집하였다. 많은 출판사들이 번역서 생태계를 파괴한다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간간히 좋은 번역본도 나왔고, 특히 평소 책을 많이 안 읽고 책값이 비싸다고 투덜대던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더클래식 시리즈와 유사한 시리즈가 또 하나 나타났다. 참돌의 출판브랜드 코너스톤, ‘원전’ ‘완역본원칙을 고수하면서 낱권 당 5900원에서 9900원의 파격적인 가격을 자랑한다. 그로 모자라 세트로 사면 낱권 당 가격이 평균 3000원대에서 4000원대로 떨어지고, 전자책으로 사면 몇 푼 안 되는 가격에 영문판을 끼워주는 기적의 셈법을 자랑한다. 번역은 번역집단 중 가장 신뢰를 많이 받으며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이탈리아어 6개 국어 번역이 가능한 바른번역에게 맡겼다. 2012년 셜록 홈즈 전집, 올 초 데일 카네기 전집에 이어 이달 초 아르센 뤼팽 전집 절반 분을 내놓았다. 특히 아르센 뤼팽 전집은 잘 만들어져야 하는 책이었다. 현재 바른번역의 명성은 전적으로 영미번역 때문에 만들어졌다. 영미번역으로 시작했고, 다른 외국어 부문은 아직 약한 편이다. 프랑스어 부문의 경우 번역가 풀 자체가 굉장히 빈약하다. 기존의 까치글방 완역본과 황금가지(민음사) 완역본이 12년 이상 되었기 때문에, 잘만 만든다면 출판사에게도 바른번역에도 보배가 될 수 있었다.

 

 

아직 나머지 절반분이 나오지 않았지만 이번에 나온 1차분만 놓고 보면 일단 합격점이다. 바른번역 자체도 왓북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영미번역 그룹에서 2013년 아르센 뤼팽 단편들을 500원짜리 전자책으로 내놓았던 적이 있다. 번역이 거의 번역가 지망생의 연습 숙제 같은 조악한 수준이었는데, 단 한 문장도 쓰지 않고 이번에 완전히 새로운 번역본을 내놓았다. 코너스톤 아르센 뤼팽 전집엔 원전에 대한 정보라든가 작품 해설, 역자 후기가 전혀 없다. 그래서 중역본인지 직역본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은 아쉽지만, 문장이 가독성 좋고 깔끔해서 만족스럽다. 장르문학 전문가인 장경헌과 나혁진에게 감수를 맡겨 비 장르문학 번역가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주석은 그렇게 많지 않고, 본문 상에서 괄호로 처리하였다. 아르센 뤼팽 시리즈 자체가 마니아 코드가 심하다거나 내용이 어려워 주석을 많이 필요로 하는 작품이 아니기에 이 정도의 주석 양도 충분하다.

 

 

모리스 르블랑은 20대 중반부터 작가 생활을 시작해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지만 별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40대 초반 편집장의 제의로 신간 잡지 <주 세 투>에 연재한 아르센 뤼팽 단편들이 돌풍을 일으켰고, 죽을 때까지 아르센 뤼팽 시리즈 집필에만 매달린다(오랫동안 아르센 뤼팽 시리즈 마지막 작품은 <아르센 뤼팽의 수십 억 달러>로 알려져 왔으나 그 후에도 써왔고 죽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은 원고가 있다는 사실이 19년 전에 발견되었음.). 모리스 르블랑은 양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었는데, 전쟁 중에도 발표 공백이 2년이 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래서 아르센 뤼팽 전집은 모리스 르블랑의 출세작이자 그의 전부이다. 모리스 르블랑은 젊은 시절 지금의 아이돌 소녀 팬들처럼 당대 쟁쟁한 프랑스 문인들을 쫓아다녔고 특히 모파상을 열렬히 숭배하였다. 뤼팽은 평생 프랑스적인것을 고민하던 그가 만든 궁극의 프랑스적 슈퍼 히어로였다.

  

 

장르문학계에서 아르센 뤼팽 시리즈는 장르문학사의 중요한 고전으로 인정하는 것 외에 크게 평가를 하지도 않고 관심도 별로 없다. ‘오타쿠로서 팔 거리가 별로 없는 책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독자가 정교한 트릭을 맞추는 재미를 별로 느낄 것도 없고, 변신에 능하고 로맨티스트이며 기타 등등 성격적으로 엄청나게 매력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허구한 날 잡혔다가 도망갔다가 난리다. 하지만 그런 점들 때문에 아르센 뤼팽 시리즈는 국민 오락 소설이 되었다. 부자들이 가진 온갖 보물들을 훔치지만 순전히 재미로 즐기는 것일 뿐 탐욕이 없다. 길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를 만큼 별별 모습으로 분하며 프랑스 전역을 활보하고, 프랑스인의 온 몸은 낭만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쟁 중에 잠시 현실 도피하게 해준 웃기는 친구였고, 30년 이상 이어지며 당대 프랑스와 같은 시공간을 공유했으니 어떤 프랑스인이 뤼팽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주 세 투>의 편집장 피아르 라피트은 셜록 홈즈의 대항마를 원했고, 자신의 잡지가 프랑스의 <스트랜트 매거진(셜록 홈즈 시리즈 연재처)>가 되기를 바랐다. 재밌는 것은 모리스 르블랑은 코난 도일도 셜록 홈즈도 전혀 모른 상태에서 아르센 뤼팽 시리즈를 내놓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처음엔 셜록 홈즈 시리즈의 의식은커녕 홈즈 자체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독자들이 뤼팽에 처음 전율을 느낀 것은 허를 찌르는 설정들 때문이었다. 주인공이 도둑인데 정의와 불의의 경계에 있는 애매한 인물이라 선악을 판단할 수 없고,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첫 두 단편 제목은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감옥에 갇힌 아르센 뤼팽이었다. 이미 셜록 홈즈의 인기가 대단했던 프랑스였지만, 뤼팽은 자존심 강한 프랑스인들의 심리 기저-프랑스를 대표하는 새로운 영웅에 대한 갈망-를 건드리며 단숨에 그들을 사로잡았다.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 우연히 뤼펭의 친구가 된 이가 뤼팽에게 직접 들은 체포담. 항해 중인 프로방스 호에 아르센 뤼팽이 타고 있다는 전보에 가니마르 형사 일행은 촉각을 곤두세우는 중. 마침 승객 넬리 양의 보석 도난 사건이 벌어지는데…….

감옥에 갇힌 아르센 뤼팽 프로방스 호 사건으로 수감 중인 뤼팽, 말라키 성에 사는 카오른 남작에게 그의 보물을 훔쳐 가겠다는 뤼팽의 예고장이 도착하는데…….

아르센 뤼팽, 탈옥하다 말라키 성 사건 이후 가니마르에게 탈옥하겠다고 호언장담한 뤼팽, 정말 감쪽같이 심리법정에서 사라지는데…….

불가사의한 여행객 뤼팽의 회고담. 포박에 가방을 빼앗기는 굴욕을 당한 뤼팽, 그것도 모자라 다들 범인이 뤼팽이라고 생각하는 상황. 뤼팽은 줄을 풀고 가짜 뤼팽을 잡으러 가는데…….

왕비의 목걸이 꼬마 뤼팽과 연관된 왕비의 목걸이 도난 사건. 뤼팽의 가족사가 처음 등장하는 작품.

하트 7 얼떨결에 뤼팽의 전담 연대기 작가가 된 사연. 하트7이란 이름을 가진 잠수함과 그에 얽힌 사람들의 실체와 관련된 기묘한 이야기

앵베르 부인의 금고 아르센 뤼팽이 유명해지기 전, 뤼팽이라는 이름 자체도 없던 시절의 이야기. 뤼팽은 자신의 생애 최초로 어떤 부인에게 보기 좋게 속은 사건을 친구에게 털어 놓으며 흥분한다.

흑진주 흑진주를 훔치러 간 뤼팽, 흑진주는 없고 한 여인이 죽어 있다. 당연히 가니마르는 범인으로 뤼팽을 의심하고, 뤼팽은 직접 진범을 찾아 나선다.

헐록 숌즈, 한발 늦다 뤼팽과 숌즈(홈즈)의 첫 대면. 뤼팽의 정체를 알고 뤼팽을 잡으러 나선 숌즈는 뤼팽을 보고도 놓치는데다가 뤼팽에게 소매치기까지 당하는데…….

 

모리스 르블랑은 아홉 편 연속 단편소설로 아르센 뤼팽 시리즈를 내놓는다. 그걸 엮은 아르센 뤼팽 전집 첫 번째 권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은 아홉 단편으로 표현한 아르센 뤼팽의 자기 소개서 같은 책이다. 때로는 다른 입을 통해, 때로는 뤼팽 자신이 직접, 때로는 전지적 시점을 통해 뤼팽이 벌인 아홉 개의 사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스스로도 자기 자신의 원래 외모를 잘 모르겠다고 할 만큼 변신에 능한 장점을 살려 신출귀몰한 뤼팽, 특히 그가 날리는 예고장은 이후 수많은 괴도물이 오마주로 이용하는 코드가 되었다. 모리스 르블랑은 아홉 번째 단편 헐록 숌즈, 한발 늦다를 통해 처음 뤼팽과 숌즈(홈즈)를 만나게 한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이기려고 만들었기에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서 숌즈는 뤼팽에게 늘 지고, 독자들은 그걸 아는 상태에서 둘이 어떻게 투닥이는지를 지켜보기 위해 책장을 넘긴다. 헐록 숌즈, 한발 늦다를 읽고 아쉬움을 느끼기도 전에 두 중편 소설로 이루어진 뤼팽과 숌즈의 대결 <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가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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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성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3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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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성] 명불허전 아르센 뤼팽 시리즈 대표작

 

 

 

프랑스 노르망디 북서부 해변에 에트르타(Étretat)라는 도시가 있다. 이 도시 해변에는 에기유 크뢰즈(L'Aiguille Creuse;구멍 뚫린 바늘)라 불리는 독특한 바위 절벽이 있는데 ‘악마의 이빨’이나 ‘코끼리 바위’라는 별칭으로 더 익숙한 곳이다. 코끼리 같은 아치형 절벽이 셋 모여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두 번째 크기의 아치형 절벽. 모리스 르블랑이 속이 비어 해저터널로 연결된다는 상상력으로 아르센 뤼팽의 ‘비밀 창고’의 위치이자 같은 제목의 소설로 만든 장소이기도 한다. 그래서 생김새 자체도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기암성>의 실제 모델이라는 이유로 오늘날에도 관광 명소로 유명한 곳이다. 원제도 그렇고 소설 안에서도 에기유 크뢰즈라는 단어가 계속 반복되는데 왜 제목은 ‘이상한 바위 성’이란 뜻의 <기암성>일까. 일본이 이 소설을 번역하면서 처음 고안한 이 단어를 우리가 그대로 따라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단 두 나라만 아르센 뤼팽 시리즈 세 번째 책을 <기암성>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의 소설가 쥘리앵 그라크는 <기암성>을 “프랑스어로 쓰인 가장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라며 극찬을 하였다. 아르센 뤼팽 시리즈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자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다. 아예 <기암성> 자체가 아르센 뤼팽의 전부인지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을 만큼 가장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작품이다. 모리스 르블랑은 <기암성>을 발표하던 해 피가로 지에 짤막한 에세이 형태로 자신의 추리소설론을 발표하며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 대한 집필 철학을 완전하게 세운다. <기암성>에는 모리스 르블랑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상상력, 프랑스적 가치의 강조, 헐록 숌즈(셜록 홈즈)에 대한 조롱 등이 모두 담겨 있다. <기암성>의 백미 중 하나는 철가면과 뤼팽의 연결이다. 그 때문에 연재 당시 역사적 서술이 늘어졌던 것을 줄여 1909년 정식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이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기암성>이다.

 

 

모리스 르블랑의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1907)>, <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1908)>, <기암성(1909)>는 연달아 나온 작품이다. 그런데 <기암성>은 마치 전작들과 오랜 공백이 있었다고 착각할 만큼 작품성에 있어 현격한 발전을 보인다. 복선도 정교해지고 전개도 복잡해지며, 시공간적 폭이나 주제와 소재도 훨씬 확장된다. 아마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은 단편집이었고 <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 집필 동기인 ‘반 셜록 홈즈’적 철학에 충실해 홈즈를 공격하는 데 최선을 다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기암성>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된 아르센 뤼팽 소설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 같다. <기암성>에도 역시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후반부부터 모습을 드러낸 숌즈가 출연한다. 그런데 <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보다 더 무능하다. ‘셜록 홈즈’라기 보다는 동명이인의 악당에 가까울만큼 홈즈스럽지 않아 셜로키언들을 부들부들거리게 한다.

 

 

소설은 제르브르 백작 집을 울리는 총소리로 시작한다. 괴한이 침입해 백작의 비서를 죽였는데 훔친 물건은 없다. 백작과 함께 사는 백작의 조카 레이몽드가 쏜 총에 범인이 맞지만, 범인은 용케 도주한다. 대장이 죽었다면 레이몽드는 각오해야 할 것이라는 협박편지를 남기고선. 유명 외과의사 들라트르가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사건을 통해 대장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보트를레의 활약으로 금세 사건이 종결되는 듯 하지만 보트를레의 아버지와 레이몽드가 납치되고, 본격적인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 <기암성>에서 뤼팽의 적수는 중년의 영국인 숌즈가 아니라 프랑스의 고등학생 보트를레다. 모리스 르블랑은 보트를레를 통해 뤼팽은 ‘셜록 홈즈’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남다른 인물이며, 굳이 뤼팽에 맞설만한 인물이 필요하다면 프랑스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노골적으로 내비친다. 아버지와 레이몽드의 납치로 완전히 국면이 바뀐 사건, 유일한 단서인 암호문을 풀며 보트를레는 뤼팽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마주하는 것이 에기유 크뢰즈에 있는 작은 성 에기유, 영국 왕실에서 프랑스 왕실로 이어져 오며 엄청나게 축적한 보물이 있는 곳이었다. 실제 역사적 사실과 모리스 르블랑의 상상력이 섞여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헷갈리는 이야기가 속도감 있게 전개되기에 정신없이 몰입하게 된다. <기암성>의 이야기판이 얼마나 뒤집히는지, 보트를레에 이입해 함께 암호문을 풀어가면서 얼마나 짜릿함을 느끼는지, 작가가 얼마나 능청스럽게 역사를 이용하는지 꼭 스스로 확인하길 바란다. 강성 셜로키언만 아니라면 아르센 뤼팽 시리즈를 저평가하는 독자들도 <기암성> 정도는 재밌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아르센 뤼팽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중 하나가 엄청난 로맨티스트라는 점인데, 뤼팽의 손바닥에서 노는 보트를레의 모험 겸 성장소설을 열심히 탐닉하다가 마주하는 그 뜻밖의 로맨스와 인간미란. 명불허전! 역시 대표작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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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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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 당황스럽고 낯선 어느 동시대인의 이야기

 

 

 

그의 파란만장하고 위험천만한 인생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모노프, 그 자신과 러시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우리 모두의 역사에 대해서 말이다.” - 엠마뉘엘 카레르


여러모로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던 독서였다. 소설의 대상이 우리나라와 역사적으로 밀접한 러시아의 대표적인 야권 인사임에도 그간 우리가 알고 있는 바가 별로 없었음을 깨달아 당황스러웠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력이 당황스러웠다. 러시아의 생존인사를 소재로 500쪽 넘게 써내려 간 이 책이 프랑스 작가가 쓴 프랑스 소설이라는 점도 당황스러웠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렇지 않을까. 한때 프랑스와 미국에서 시와 소설로 이름을 날렸던 작가였고, 지금도 자주 국제 뉴스에 등장하는 정치인이지만, 그의 문학 작품은 단 한권도 우리나라에 번역된 적 없고, 푸틴 외의 다른 러시아 정치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당장 언론 기사만 보더라도 어떤 기자는 리모노프를 급진 좌파라고 어떤 기자는 극우라고 기사를 쓴다. <리모노프> 우리말 번역본을 낸 열린책들과 역자가 내린 결론은 극우. 이렇게 평가가 갈리는 이유는 무지 때문도 있지만, 그만큼 리모노프가 정체성도 인생도 혼란스러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에두아르드 리모노프는 몰라도 엠마뉘엘 카레르를 아는 애독가는 꽤 많다. 페미나 상 수상자이고, 현재 프랑스 문단의 중요 작가 중 한 사람이며, 열린책들에서 작품을 꾸준히 번역하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이번 번역도 역시 카레르 작품 번역을 일임해오던 전미연 역자가 번역하였다. <리모노프>로 국내 애독가들 사이에서 카레르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연초에 이 책을 선물 주려하고 읽기를 강요하던 지인들이 얼마나 많던지. 겨우 겨우 말려 한권만 받고 등 떠밀려 읽으면서 읽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이 책이 뭔지는 알고 권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 리모노프는 쥐뿔도 모를 텐데 하며 말이다. 그만큼 녹록지 않은 소설이다. 현대 러시아의 정치사와 문학사를 어느 정도 알아야 재미를 붙일 수 있다.

   

  

대조적인 두 유명 인사의 삶.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에두아르드 리모노프 모두 1974년 봄에 고국을 떠났지만, 세상은 솔제니친의 출국 소식에 더 떠들썩하게 반응했다. - p.139


리모노프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2년을 보내고 귀국한 직후였다. - p.229


리모노프는 다름 아닌 펜을 든 다르타냥이었다. 인생을 살려면 패거리가 필요해, 파리에 이보다 더 생기 넘치는 패거리는 없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 p.276


에두아르드에게는 다른 계획들이 있었고, 발칸 반도 농사꾼들의 싸움보다는 조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훨씬 관심이 많았지만, 나이 오십을 코앞에 두고 여태 참전 경험도 없었고, 남자라면 언젠가 한 번쯤 꼭 필요한 경험이라는 생각에 좋다고 말했다. 그는 들뜬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 p.322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장중한 대결에서 프랑스는 시종일관 전자의 편을 들었는데, 프랑스인들이 이렇게 끝까지 감정적으로 고르바초프의 편을 들었다는 사실이 나는 놀랍기까지 하다. - p.356

 


중학생 때 무척 재밌게 읽은 단편 소설 중에 전광용이 쓴 <꺼삐딴 리>라는 작품이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인국은 출세에 눈 먼 기회주의자로 기가 막히게 시류에 영합해 친일에서 친소로 다시 친미로 입장을 바꾸며 살아남는다. 우리 문단에도 이인국과 같은 기가 막힌 처세로 평생 애증의 원로로 묵직한 위치를 지킨 작가들이 여럿 있었다. 리모노프는 기질이 좀 더 소년스럽고 충동적이기에 완전히 같은 맥락으로 놓기는 힘들지만, 그도 러시아의 이인국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책을 읽는다면 우리 독자도 이 책에 조금 더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리모노프>의 번역을 마치며 역자가 이렇게 많은 인명이 나오는 작품은 처음이다. 아마 앞으로도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 같다.”고 할 만큼 이 책은 러시아 현대사의 거목들이 대거 등장한다.

 

 

우크라이나 하급 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깡패, 거지, 작가, 집사, 군인, 정치가를 모두 경험한 1943년생 사내. 뾰족하고 전투적인 성격을 고려해 레몬(리몬)과 수류탄(리몬카)에서 딴 가명 리모노프처럼 그의 인생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을 만큼 거침없고 대책 없다. 카레르는 상종할 가치가 없는 이상한 인간이지만 그만큼 굴곡진 러시아 현대사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보고 리모노프에 집착한다. 그러나 단순한 전기소설에 그치지 않고 소설 속에 자신 역시 등장시킨다. 그래서 살아 있는 작가가 쓰는 살아 있는 작가의 전기로서 주인공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을 나란히 서술하고 기본적으로 두 가지 시점에서 소설이 전개되게끔 만들어 두었다. 이러한 작업은 <러시아 소설>과 함께 카레르의 뿌리 찾기탐구 일환이기도 하고(카레르의 어머니가 러시아계 역사가), 운명공동체인 동시대인으로서의 고민의 발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읽는 이 역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현대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에 빠지고, 긍정적인 방향은 아니지만 조국의 역사를 온 몸에 아로새긴, 너무나 러시아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한 사내에게 인간으로서 연민을 느낀다.

 

 

에두아르드의 정치관은 혼란스럽고 피상적이었다. 두긴의 영향을 받으면서 혼란은 더해졌지만 피상적인 면은 줄어들고 인용은 풍부해졌다. 두긴은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대립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똑같이 숭배했다. 그가 숭배하는 위인 목록에는 레닌, 무솔리니, 히틀러, 레니 리펜슈탈, 마야코프스키, 율리우스 에볼라, , 마시마 유키오, 게오르그 그로덱, 에른스트 윙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안드레아스 바더, 바그너, 노자, 체 게바라, 스리 오로빈도, 로자 룩셈부르크, 조르주 뒤메질, 기 드보르가 뒤죽박죽 올라 있었다. 한계를 시험할 심산으로 에두아르드가 찰스 맨슨도 추가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면 옆으로 조금씩 밀어 자리를 내줄 것 같았다. 친구의 친구도 친구니까. 빨간색이나 흰색이나 갈색이나 매한가지니까. 중요한 것은 니체의 지적처럼 오로지 엘랑 비탈이므로. 에두아르드와 두긴은 자신들의 동지인 야권 인사들이 큰 인물들이 아니라는 데 금방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 p.372

 

그는 특히 대단하다끔찍하다는 두 단어를 즐겨 썼다. 무조건 대단하거나 끔찍하거나 둘 중 하나지, 중간은 없는 사람이었다. 리모노프를 처음으로 만나고 나서 자하르는 생각했다.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자하르는 리모노프가 쓴 글을 모조리, 심지어 유소년의 상큼하고 설익은 세계관이 드러나 있다고 그 스스로 평가하는, 리모노프가 젊은 시절에 쓴 시들까지 찾아 읽었다. 이제 리모노프에게는 더 이상 유소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고, 세계를 떠돈 긴 세월동안 과거에 품었던 환상은 다 깨지고 말았다. ‘타인의 적대성을 전제로 삶의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리모노프는 말했다. 이야말로 유일하게 현실적인 세계관이며, 타인의 적대성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여차하면 죽이겠다는 각오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용감해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그와 단 몇 분만 같이 있어도 날을 세운 단단한 근육질의 몸이 뿜어대는 기운이 느껴졌고, 그가 이런 덕목을 모두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선량함의 흔적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타인에 대한 관심은 있는 사람이다. 언제나 호기심이 살아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선량함, 부드러움, 무방비 상태, 이런 것은 없다. 때문에 리모노프를 존경하고 그의 측근이라는 자리를 세상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자하르였지만 정작 리모노프와 함께 있을 때는 불편했다. - p.413

      

에두아르드가 평생을 꿈꿔 오던 것이었다. 어릴 때 <몬테 크리스토 백작>을 읽으면서. 간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들려주던 용감하고 침착하고 주체적인 사형수의 얘기를 엿듣고는 그를 청소년기의 우상으로 삼으면서. 소설의 주인공을 자처하는 사람에게 감옥은 놓쳐서는 안 되는 인생의 한 장이었고, 에두라르드는 괴로워하기는커녕 순간순간을,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가 영화 속에서 이미 수없이 본 장면들 모두를 즐겼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 p.461

 

 

몬테 크리스토처럼 감옥에 간다는 사실 때문에 설레고, 남자라면 인생에 한번쯤 전쟁이라며 인종 청소 하러 자진 참전하는 것만 보고 그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다. 물론 소설은 소설인지라 <리모노프> 속 리모노프의 대사나 사생활 묘사 등과 관련하여 리모노프가 억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디테일은 카레르의 상상의 발로라 하더라도 굵직굵직한 행보들은 뉴스로도 확인할 수 있는 실제 사실들이다. 다시 서론의 논의로 돌아와 그의 현재 정치적 입장을 평가한다면 급진 좌파 민족주의가 맞다. 그가 이끄는 민족 볼셰비키당이 극우 민족주의 이론가였던 두긴과 함께 창당했기 때문에 오해를 받는 것인데 두긴은 당을 떠나 푸틴 진영으로 합류했고, 현재의 민족 볼셰비키당은 반푸틴, 좌파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러시아의 미래를 걱정하고 강한 러시아를 꿈꿨으며 장기간 조국을 떠났다는 점에서 카레르는 리모노프(민족주의로 극복)와 솔제니친((제대로 된)공산주의)로 극복)를 비교한다.

 

 

극우든 극좌든 현재 러시아의 민족주의 바람은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세계인들이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소련 붕괴의 패닉과 냉전 시대의 강한 러시아(소련)에 대한 향수도 있고, 현재 러시아가 직면한 각종 사회적 어려움을 잊을 도피처나 극복할 대안으로 민족주의 만큼 좋은 구실이 없다. <리모노프>2011년 출간된 책으로 그 해 자국(프랑스)에서 르노도상과 문학상의 상을 수상하고 2012년 네덜란드에서 유럽문학상을 받았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리모노프는 여전히 정치인으로서 건재함을 과시하며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을 통합해야한다는 등의 궤변을 늘어놓으며 극단적 민족주의자로 살아가고 있다. 작년 우리 출판계의 유행 이슈 중 하나는 문학, 비문학 모두에서 나타난 개인적 관점에서의 역사 읽기였다. 그래서 <나의 한국 근현대사>, <소년이 온다>, <투명인간>,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등이 선전하였다. 카레르의 작가적 입지도 있지만 <리모노프>가 올초 번역된 것도 이 이슈의 연장선인 감이 없지 않다. 재작년과 작년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으로 대박을 쳤던 열린책들이 올해 <리모노프>로도 선전을 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P.S.- 정치인으로서의 리모노프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아래 링크한 박노자 교수의 블로그 글을 읽어보시길. 2011년에 쓴 글이지만, 리모노프와 좌파 민족주의에 대해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지금도 참고 삼아 읽기 괜찮은 글이다.

>>> 보편적 현상으로서의 좌파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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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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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絶望の国の幸福な若者たち(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2011;일본)

 

 

절망에서 나는 오늘도 꽤 잘 삽니다  

 

 

 

2013년 한 소셜커머스 업체에서 톱스타 전지현을 내세운 광고를 내세웠다. 메인 카피는 “○○이 있어서 나는 오늘도 꽤 잘 삽니다”였다. ‘꽤 잘 삽니다’, 필자는 문득 이 카피가 이태백, 인구론, 3․5․7포 등의 주인공인 청년들의 삶을 잘 표현한다고 생각하였다. 심지어 히키코모리도 말이다. 본의 아니게 직접 그렇게 살아본 적도 있어서 안다. 어른의 인생룰 중에 ‘나잇값을 못하면 자유로워지는 대신 외로움을 얻는다’는 것이 있다. 혹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남의 이목을 신경 쓰며 ‘나이에 맞는’ ‘평균’적인 삶을 맞추려 아등바등한다고 비아냥대는 사람이 많은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세상은 생각보다 급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20대 중후반에 취업을 하고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 사이에 결혼과 출산을 마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30대의 신입사원이 있어도 그 주인공이 ‘나’가 될 확률은 극히 희박하며, 어느 순간부터 연애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만날 친구의 범위가 극히 적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필자는 3포 중이다. 직업은 없지만 별별 일을 하고 있는 소위 말하는 ‘프리랜서’이고 수입이 롤러코스터를 타서 가끔 강제 히키코모리가 된다. 아무리 절약을 해도 주거는 해결하지 못해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빨대를 꽂았다. 집안일을 전담하고 웬만한 수리나 공사를 스스로 하는 대신 숙식을 제공받았다. 식사는 거래처 미팅이나 아르바이트에서 거의 해결하고, 여러 루트에서 예쁨 받고 음식을 얻었다. 그렇게 살면서, 경조사 불참하고 최소한의 친분관계만 맺으면 꽃다운(?) 2말3초에도 교통비 제외하고 한 달에 10만원 정도면 충분히 산다. 임금이 남으면 신나게 적금도 붓고 학자금 대출도 갚고 경조사도 나간다. 당신이 (더 잘 알지 못하겠으나) 히키코모리로 살아도 몇 가지 가능한 소득생활이 있는데 필자의 경우는 매글을 했다. 첨삭(교정), 타이핑, 기고, 대필, 광고알바, 공모전 등 다양한 일거리가 있지만, 당신이 엄청난 재능이 있지 않는 한은 밖에서 발품 파는 것만큼 벌지 못한다. 대인 관계는 상품권 쿠폰 전송으로 해결하였다. 적응하니 외로움도 모르겠고 살만 하였다.

 

 

강신주가 말하는 좋아하는 일을 하며 충분히 휴식하는 인간, ‘상담이 거의 필요 없는 자본주의를 극복한 인간’에 거의 다다랐다. 하지만 필자의 ‘행복’은 몇 년 째 울면서 ‘나는 행복합니다’를 열창하는 한화 팬의 ‘행복’ 같은 것이었다. 필자는 그 ‘꽤 잘 살만 함’이 무서워서 ‘프리랜서’가 아닌 ‘백수’라고 말하며 오늘도 이력서를 넣고 2,3,4잡을 뛴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의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2011년 일본 최대 출판사 고단샤에서 같은 제목의 원서를 출간하며 이런 특수한 상황의 나라는 일본밖에 없는 것 같다고 하였다. 하지만 2014년 말 나온 우리말 번역본을 읽으며 한국과 일본이 어쩌면 이렇게 닮았을까 싶었다. 민음사도 그렇게 생각해서 번역했을 것이다. 원서가 출간된 지 4년이 넘은 지금 일본의 사회학 연구는 저출산 고령화 관점에서 전 세대 전 방위를 다룬다. 사토리 세대의 절약? 주 1만원 내외로 쓰는 노인들이 등장하였다.

 

 

전쟁 중의 ‘젊은이 희망론’은 1990년대에 사업자들을 위해 내세운 정책과 매우 비슷하다. 거품경제가 붕괴하고, 일본은 기업의 수를 늘리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발표했다. 그때 정계‧재계에서 나온 메시지들을 살펴보면, 사업가는 일본 경제의 구세주이며 고용창출도 담당하고 ‘공공’과 윤리를 중시하면서, 실패한 경우에는 자기 책임을 다하는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진정 사업가는 ‘편리한 협력자’인 것이다. 단지 사업가에 국한하지 않고, 오늘날에도 정치인이나 경영자, 문화계 인사까지 “젊은이는 좀 더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어른들이 적잖다. 이러한 지적 자체는 환경할 만한 일이다. 나도 젊다는 이유만으로 다양한 혜택을 받아 왔다. 이 책을 출판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내가 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만 ‘젊은이 희망론’은, 종종 암묵적으로 젊은이들을 편리한 협력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젊은이에게 권리나 구체적인 혜택, 기회는 주지 않고, 그저 ‘노력하라.’라고만 다그치는 행동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다. 아무튼 황군의 병사가 되어야 했던 과거의 젊은이들과 달리, 오늘날 일본의 사업가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경우가 아닌 이상) 목숨을 잃게 될 정도의 일은 겪지 않아도 되니, 그나마 다행이다. - p.61

 

그런 이시하라 신타로(78세)가 지금에 와서는 “젊은이에게 자위대, 경찰, 소방관, 청년 해외 협력단처럼 ‘타인을 위해 몸을 혹사하는’ 직업을 갖게 해, 일 년 동안 구속해야 한다. 공공을 위한 봉사를 통해 심신을 긴장시킴으로써, 감정을 관장하는 뇌관을 단련시킬 수 있다.”라고 당당히 말하고 있다. 1955년 당시에, 이 사회가 이시하라 신타로라는 ‘젊은이’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를 줬었는지 벌써 잊었다는 말인가? 그렇겠지, 잊었겠지. - p.68

 

절반 이상의 젊은이들이 스스로 ‘행복하다.’라고 느끼면서, 동시에 ‘불안하다.’라는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p.131

 

판매 부수 누계가 2억 부를 돌파한 현대판 성서 <원피스>에 흐르는 사고방식은 ‘동료를 위해서’로 요약될 수 있다. <원피스>의 인물들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동료들에 대한 헌신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있다. 뚜렷한 적도 없고, 절대적인 악도 없는 그 세계에서, 루피(19세, 후샤 마을) 일행은 끝을 알 수 없는 ‘동료 찾기’를 이어 간다. 현실의 젊은이들도 사정은 (루피 일행과) 마찬가지다. 이제 딱히 ‘젊은이 문화’라고 지칭할 만한 공통성이 사라진 시대에,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동료’와 함께 지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사회학자 야마다 마모루(38세)도, 현대의 젊은이들이 자아 정체성의 근간을 가까운 인간관계 등 여러 가지 ‘관계’ 혹은 ‘집단에의 참여 자체’에서 찾고 있다고 언급했다. - p.140

   

먼 나라의 혁명보다도 계란덮밥 - p.182

 

 

사토리(득도) 세대. 인생에 있어 가장 정력적이고 성취 목표가 많은 나이에 붙이는 단어가 ‘득도’라니, 듣기만 해도 슬퍼진다. 연애는 운에 맡기거나(초식) 관심을 끊고(절식), 취업이 안 되면 이런 저런 알바를 하며 살 만큼 벌며(프리터) SNS로 욕망의 허기를 채우며 그럭저럭 잘 산다. 정치나 사회문제에 별 관심은 없지만 SNS에서 화재가 된다거나 뭔가 재밌어 보이면 놀이를 하듯, 친구를 사귀러 가듯 참여한다. 걱정하다가 비난하다가 하며 청년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삼촌 세대(40대)에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고민한다. 일본에 단카이 세대와 사토리 세대가 있다면 한국은 부자 관계로 더욱 세대적 결속이 끈끈한 베이비붐 세대와 3포 세대가 있다. 3포 세대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며 다독이는 베이비붐 세대의 위로와 X세대의 연민을 받는다.

 

 

40대에게 휘둘리는 사토리 세대처럼 3포 세대도 486 세대와 반목한다. 지금은 586으로의 진입을 앞두고 베이비 붐 세대와 조금 다른 색깔의 ‘힐링 멘토’로 인기 몰이 중이지만, 과거 20대 개새끼론을 내세우며 자신의 자식인 촛불 소녀만이 희망이라 외치던 이들이었다. 대부분은 사토리 세대처럼 3포 세대도 손톱 숨기고 저항하지 않는 ‘차별에 찬성하는 괴물’이 되었지만, 비슷한 미래를 영위하게 된 촛불 소녀들을 고소해하며 그들과 10대들을 거짓선동하고 486을 욕하는 재미로 사는 ‘일베라는 괴물’이 된 자도 있다. 사토리 세대에서 넷우익이 있다면 3포 세대엔 일베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방식은 진심보다는 패션(코스프레)이고 게이미피케이션으로 정의할 수 있는 흥미성 참여 양태이다. 원피스적 세계관을 가진 사토리 세대처럼 3포 세대는 악플보다 무플이 두렵고 좋아요에 집착한다.

 

 

 

신고는 보수 계열 단체에서 직접 활동하고, 고스케는 ‘니코니코동영상’ 등 인터넷을 경유해 활동한다는 점에서 서로 차이가 있지만 ‘우익 계통’의 주장과 공간이 그들에게 ‘마음 둘 곳’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고는 자신의 보수 계열 활동을 영화 감상에 비교했고, 고스케는 민주당의 정책을 ‘비판거리’로 삼아 즐기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정치 활동은 진지하면서도, 동시에 실질적인 (정치 활동의) 대상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 p.206

 

"일본은 대지진을 통해 하나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거나 모금 활동에 참여하면서 “일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라고 언급한 젊은이도 많았다.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생활하는 한, ‘일본’이 ‘일본답지 않은 요소’를 통해 전면적으로 부각되지 않는 이상, 그것(일본이라는 국가)은 좀처럼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3장) 그러한 의미에서 대지진이라는 천재지변은 평소와 다른, 즉 ‘일본’이라는 존재의 바깥쪽에서 날아든 것이다. - p.245

 

"삼촌들이 젊은이들을 걱정해 주고 있다!"라고 생각하니 순간 눈물이 날 뻔했지만, 어쩌면 삼촌들이 ‘세대 간 격차’ 문제를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그렇게 할수록 ‘세대 간 격차’ 문제의 해결은 요원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의회제 민주주의를 채택한 일본에서 사회 문제를 세대 문제로 처리해 버리는 한, 젊은 층에게는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 p.284

 

통계적으로도 젊은이의 ‘확연한 빈곤’을 발견해 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아사자 수는 2009년에 1656명이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 20대는 4명, 30대는 15명 정도에 불과했다. 아마도 ‘인터넷카페 난민(일종의 노숙자로 일정한 주거지 없이 인터넷카페를 전전하며 잠자리를 해결하는 사람들을 말한다,’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빈곤’이었기 때문에, 실제 수치와 관계없이 미디어에서도 주목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는 겉보기에 참으로 풍요로워 보인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풍요로움과 행복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젊은이의 빈곤 문제가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것(빈곤)이 젊은이들에게 현재의 문제라기보다는 앞으로 나타나게 될 미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젊은 층일수록 같은 세대에 속한 사람들 간의 격차는 적다. 20대의 경우에는 정사원이든, 프리터이든, 급여 격차가 그리 크게 벌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연공서열, 종신 고용을 전제로 하는 급여 체계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의 대기업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젊은 사원의 연봉은 규정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아르바이트의 경우에는 근로하는 날짜와 시간대만 조정하면 같은 세대의 정사원 이상으로 수입을 올릴 수 있다. - p.291

 

 

모든 시대에서 젊은이는 나이와 가능성 외에는 쥐뿔도 없는 약자였다. 기성세대는 늘 요즘 젊은이는 참 문제고 세상은 말세라고 했고, 그 문제적 젊은이가 무럭무럭 늙어 기성세대가 되어 같은 말을 하였다. 대개 한 시대의 평가는 동시대에서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고 한 세대의 평가는 동세대는 객관적으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변호’는 언제나 가능하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가 주목 받은 것도 그 때문이다. 저자는 1985년생, 책을 낼 당시 27세의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연구원이었다. 일본의 젊은이로서 일본의 젊은이들에 대한 평가와 그들이 듣는 충고에 대해 당사자로서 정체성 고민에 빠져 들었다. 그의 전공은 처음부터 사회학이 아니었으나 그런 문제의식들이 그를 사회학자로의 길로 이끌었다.

 

 

책은 젊은이의 한 장을 할애해 정의의 역사와 젊은이론의 역사를 고찰하며 시작하여, 나머지 장은 사토리 세대의 정체성을 다각도로 분석한다. 우리말 번역본엔 원서에 없던 한국어판 서문과 오찬호 교수의 해제가 덧붙여졌다. 치열한 문헌고찰법과 인터뷰가 촘촘하게 저자의 탐구와 어우러져 읽는 맛이 좋은 책이다. 기성세대들은 일본의 젊은이들이 젊은이다움을 잃어버린 ‘이상한’ 득도를 향해 정진한다고 한다. 어려운 시대, 불행한 시대에 저항하지 않고 안주한다고 한다.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해 아직 그 불행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성세대가 보는 것처럼 일본의 젊은이들은 대체로 행복하다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 행복이 불안을 업은 행복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정말 비극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언젠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지금은 폭풍 전야라는 것을.

 

 

<우리는 차별에 반대합니다>를 쓴 오찬호 교수는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해제의 제목을 ‘일본은 절망적이고 한국은 ‘더’ 절망적이다’라고 붙였다. 비슷한 이유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의 번역본 출간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다. 찾아 읽은 책이 아니라, 생겨서 읽은 책일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일본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며 일본에 관심을 갖지만 아주 똑같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우리 젊은이가 쓴 이런 책을 더 읽고 싶었다. 그러나 읽어보니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배운 바도 많았다. 우리도 우리 사회에 대한 전 세대, 전 방위적 접근이 시작되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상황이 나아질 확률은 거의 없다. 어찌되었든 젊은이는 살아야 한다. 견뎌서 늙은이가 되어야 한다. 요행과 합리화의 유혹을 참고 전력투구해야 한다. 이왕 전투하는 것, ‘나와 너’를 알고 달리면 더 좋으니까 이런 책도 읽어가면서.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 15기 "2015년 2월 좋은 리뷰"로 선정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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